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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Alice's Casket
Review 1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4630 bytes / 조회: 834 / ????.06.19 01:43
잡설


-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은 대체로 재미있었다. '대체로'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블룸이 좋아하거나 재미있어한 작가편은 읽는 나도 재미있었고 역으로 그가 그닥 흥을 내지 않는 작가편은 지루하고 산만해 읽는 나 역시 재미가 없었기 때문.

눈에 띄었던 건 『인형의 집』의 헨리크 입센이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는 부분. 입센을 그의 희곡 그것도 고작 한 편을 통해서만 보았던 나는 그가 '페미니즘을 전혀 알지 못하며 『인형의 집』이 친구의 실화를 소설의 소재로 쓴 것 뿐'이라는 말을 했던 것도 몰랐다. 생각해 보라. '거룩한 의무'(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남편에게 내겐 '다른 거룩한 의무'(나 자신에 대한 책임)도 있다고 맞서던 노라를 만들어낸 작가가 페미니즘과 무관하다는 얘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작가는 글의 소재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끌어다 글을 쓸 수 있는 종족임을 새삼 실감한다. 그와 별개로 블룸이 선택한 입센의 텍스트 『헤다 가블레르』는 기회가 된다면 읽어 보고 싶다.



- 친구와 얘기 중에 어쩌다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 주는 남자 : 더 리더』에 대한 화제가 나왔다. 예전에 나는 책과 영화를 본 직후 소설 속에서 미하엘이 그랬던 것처럼 친구에게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문득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할까 궁금했다. 그러나 친구는 예전의 대화를 기억도 못할 뿐더러 오히려 궁금해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데?

장르소설과 본격소설의 차이는 뚜렷하다. 장르소설은 정서를 흔들고 본격소설은 이성을 두들긴다(못해 간혹 두들겨 패기도 한다). 슐링크의 소설은 그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친구는 내게, 나치전범 재판을 참관하던 중에 진실을 깨달은 미하엘이 왜 한나를 찾아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마 이게 로맨스소설이었다면 미하엘은 한나를 찾아갔을 테고, 미하엘은 한나를 용서했을 것이고, 둘은 화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본격소설이며, 본격소설의 힘은 결국 '은유와 환유'에 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을 2차대전 전,후 독일세대로 치환하면 미하엘이 한나를 외면한 행동에서 나치전범을 다루는 (독일의)다음 세대의 입장이 읽힌다. 

한나의 책장에 꽂혀 있던 목록이 의미심장하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직후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벌거벗은 자신의 몸이었듯 마침내 문맹을 떨친 한나가 발견한 건 자신이 저지른 '죄'였고, 살인보다 문맹을 더 부끄러워했던 자신의 '무지'였을 것이고, 무지에 눈을 뜬 순간 맞닥뜨린 자신의 '진짜 수치'였을 것이다. 그녀의 옥사를 둘러 보던 미하일이 글을 몰랐던 그녀가 오래전 자신의 졸업사진이 실린 신문을 오려 보관해왔던 것을 발견하는 장면은 지금도 울컥 가슴이 치민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던 고사가 새삼스러웠던 장면이다.




-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간 길에 또다시 책을 대출했다. 미치겠군;;;
가끔 책장 앞에서 책을 주욱 훑다 '으악, 이를 어째! 다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어떤 책부터 읽어야 될지 모르겠어!' 혼자 원맨쇼를 벌이곤 한다. 그럼 뭐하나. 막상 계속 읽고 있는 건 도서관 책인 걸.



- 문학에서 가장 지적인 장르는 뭘까, 라고 내게 누가 묻는다면 나는 두 말 않고 "SF!!!" 라고 외치겠다. SF는 정말 지적인 작가의 지적인 글쓰기의 향연이다. 이토록 현란하고 고급스러운 지적 유희라니. SF가 장르 편식이 심한 국내에서 허황된 만화적인 판타지 정도로만 치부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다. 매번 출간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절판 소식을 두려워하며 눈치 보듯 책을 사야 하는 현실도 한숨 나오고. 어려운 사정에도 꾸준하게 책을 내주는 출판사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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