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가 꽃보다 아름답다 <꽃보다 할배(2회)> > 설(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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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4938 bytes / 조회: 840 / ????.07.14 14:15
할배가 꽃보다 아름답다 <꽃보다 할배(2회)>


케이블에서 방영 중인 <꽃보다 할배> 2회를 보고 씁니다.

그냥저냥 봤던 1회와 달리 2회는 보는 중간 중간 잡념이 끼어들어 시청을 방해하는 방송이었어요.
홈에도 몇 번 썼지만 프랑스 소설은 제 취향과 좀 어긋납니다.
저한테 국한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변에 천착하는 감성이 (프랑스어 특유의)쉴 새 없는 수다와 어우러지니 매번 피곤한 독서가 되거든요. 물론 화자가 조용조용 차분할 때조차 수다처럼 들리는 현상은 제 편견일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각설하고,
그런데 2회의 거의 말미 즈음, 할배들이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서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나왔을 때였어요.
저런 도시에서 태어나 저런 풍광을 보고 자란 그들의 감성에 대한 몰이해가 프랑스 소설을 읽는 데 진입장벽이 된 것은 아닌가, 곰곰 생각했어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자유분방함 그 바닥에 깔려있는 문화의 뿌리가 새삼 궁금하고, 개인적으로 프랑스 소설과 문인들을 다시 되돌아봐야겠다 생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할배들의 여행을 보면서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여행도 몸이 건강할 때, 젊을 때 다녀야겠구나, 라는. 팀에서 막내인 일섭할배(그래봤자 72세)는 도보로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여행을 무척 버거워하는데 반면 팀의 맏형 순재할배(무려 80세)는 벌써 '직진본능'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정력적으로 움직입니다. 무리가 움직일 때는 단체행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섭할배가 뒤처질 때마다 사실 조금 걱정됐거든요.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방송의 특성상 나이든 분을 대상으로 혹시 민폐캐릭터가 탄생되는 게 아닐까 해서요. 그런데 반전이랄까, 할배들은 일섭할배의 아픈 무릎을 일부러 의식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소소하게 챙기고 배려합니다. 그리고 정력적인 순재할배의 의견대로 샹제리제 거리를 산책할 것인가 아님 무릎이 아픈 일섭할배의 의견대로 숙소로 돌아갈 것인가 의견이 갈렸을 때, 젊은 사람들이었다면 분명 감정적인 골이 생기고 분열의 단초가 되었을 상황을 할배들은 유야무야 자연스럽게 정리합니다. 과거와 현재보다 남은 시간, 다가올 시간이 더 중요한 이들에겐 그런 다툼조차 낭비처럼 여겨지는 걸까요. 흐뭇하면서도 왠지 짠한 장면이었어요.

2회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구할배였는데요.
처음 세워질 당시 흉물이라고 반대했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유산이 된 에펠탑을 예로, 젊은 사람들이 지금은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가치일지라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기회를 개척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는 구할배의 모습은 앞서 숙소에서 어린 여학생이 50일 일정으로 혼자 여행 중이라는 얘기를 할 때 유난히 귀기울여 경청하던 모습과 오버랩되어 설명하기 힘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 형광부분은, 구할배의 말을 제가 의미축약한 거예요)
이미 지나간 것들에 연연하느라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그 때문에 다가올 미래의 어떤 가치와 기회마저 놓친다면 젊음이 영원하지 않은 인간에겐 얼마나 아깝고 억울한 낭비일까요. 그래서인지 할배들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앞서가고 있는 이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어서일까요, 흘러가듯 하는 이 말이 매번 참 진솔하게 들립니다.

타산지석이라고, 할배들을 통해 아직 젊은 제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늙어가는 것 혹은 나이들어가는 것의 서러움은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가이드 역할을 맡은 이서진 씨의 '(할배들에 비하면)전 아직 애기예요, 전 미성년자예요.' 웃던 모습은 문학으로 치면 행간의 여백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아직 이른 거라는 말이 있지요. 기회의 늦고 빠름이 젊고 늙음과 동의어가 아님을 보여주는 할배들, 진정 당신들이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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