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트의 단편극을 소재로 했다는 질 들뢰즈의 에세이 출판 소식에 검색을 하던 중.
어느 친절한 블로거 덕분에 S. 베케트의 10여 분 분량의 TV 단편극 네 편을 본 것 까지는 좋았으나, 처음의 반가움은 첫 번째 영상이 시작되고 30여 초가 지나면서 사라졌다. 대신 정신적으로 지난한 인내심을 요구받는 시간이 시작됐고 결국 네 번째 영상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2013년을 살아가는 시각으로 보아도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네 편의 극을 통해(비록 마지막 편은 시작 직후 정지시켰으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건 베케트가 '고독'이라는 주제에 어지간히도 천착했구나- 라는 것. 고독은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그것의 속성 자체가 견뎌낼 것을 요구한다. 그건 인내심도 뭐도 아니다. 그냥 '견뎌낼 것'이다. 비록 '극'의 형태라고는 하나 맨정신으로 '고독의 속성'을 마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올해는 유난히 희곡을 많이 읽은 듯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올초부터 베케트, 브레히트, 가오싱젠으로 이어진 험난했던 구매 때문인 듯 하다. 품절과 절판, 국내 미번역 등의 이유로 유난히 책을 구하기가 힘들었던 탓에 체감상으로는 올해 1/3은 내내 그들의 희곡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 가오싱젠의 경우 책 내지에 생생한 공연 사진 일부가 삽입된 탓에 책을 읽고 시간이 좀 지나니 마치 그의 연극을 실제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문득 들곤 한다.
죽음에 가깝고, 삶에 저항하는, 그러나 충만한 생이 천재들의 전유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선행조건이 고독을 직시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천재들의 몫으로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범인들은 그것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 베케트의 부조리는 공간에 갇힌 개인의 고독을 직시하고, 카뮈의 고독은 (사회)시스템에 억눌린 개인의 저항을 직시한다. 그리하여 한쪽은 지극히 쓸쓸하고, 한쪽은 지극히 허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