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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499 bytes / 조회: 1,140 / ????.11.12 18:41
필립 K.딕 전집 박스세트 출시 후 폭풍




현대문학(출)의 장르소설 임프린트인 폴라북스에서『안드로이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끝으로 필립 K.딕 전집을 완간하고 12권 세트박스 판매에 들어갔는데, 이게 후폭풍이 꽤 심하다.
일단 가격적인 측면에서, 전집박스세트가 낱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싼데, 심지어 구간은 기껏해야 20%할인인데 신간이 포함된 박스셋은 무려 30%할인이다. 거기다 '박스'도 준다. 나야 뭐 '박스'에 연연하는 편이 아니다보니 그러려니 했는데 온라인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니 가격 할인율보다 '박스'가 기존 구매자의 빈정을 상하게 하는 것 같다. 판매자 입장에서야 낱권씩 파는 것보다 묶음판매가 더 이득이고, 구매자도 그런 부분은 어느 정도 수긍하기 때문인 듯 한데. 그러니까 싼 건 이해해, 그런데 왜 (1권 1권 정성으로 사모은) 나는 왜 박스 안 줘! 다. 실제로 국내 SF소설 시장이 워낙 열악하니 이쪽 매니아들은 웬만한 사정은 토닥토닥 이해하고 넘어가는 정서가 있다.
장르소설에 가장 호의적인 온라인서점은 알라딘. 사장 개인의 호감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 후폭풍에 알라딘이 제일 먼저 나섰다. 비록 한정수량이긴 하나 알라딘 온라인에서 시리즈 중 여섯 권 이상 구매한 독자에게 박스를 보내주기로 한 것. (http://blog.aladin.co.kr/tbox/6689083)

주변에 이 얘기를 해줬더니 '넌 신청 안 하느냐'고 묻는다. 평소 필립 K.딕의 얘기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다들 내가 당연히 이 시리즈를 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번 완간박스셋을 보니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아닌데 필립 K.딕에 대한 내 마음은 좀 이율배반적이라 글쎄…. 요즘 인터파크나 11번가에서 괜찮은 전집이 종종 파격가로 풀리는데 그때 이 전집이 올라오면 사볼까 싶긴 해도 당장은 구매할 마음이 없다.
순수하게 '문학적'이라는 의미로 보면 필립 K.딕의 소설은 사실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문장은 엉성하고, 플롯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성글고 거칠다. 기승전결은 애매하고 그나마도 기승전결을 다 갖춘 소설도 찾기 힘들다. 게다가 단편은 더더욱 무크지 같은 데서 에피소드 하나를 떼어 온 것처럼 뜬금없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그의 소설은 내러티브가 실종되고 플롯만 남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소설이 아니라 시놉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조차 한다. 특히 그의 단편은 쫓아가는 게 숨이 찰 정도로 내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가 시간에 쫓기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문학적 엉성함에도 필립 K.딕은 두 말 할 것 없이 천재다.
필립 K.딕은 생계형 작가의 표본인데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 작가다.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이 단편인 것도 그의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 매주 한 편씩 써서 신문사에 던져주고 그걸로 일주일치 빵으로 바꾸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고 하니 그에게 생계는 하루하루 벼랑 끝 한 걸음이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사후에 그의 소설들이 차례로 영화화 되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삶의 농간이란...
천재는 두 부류가 있다. 완벽한 세계를 제시하고 그 자신이 사다리 꼭대기에 선 이와 그 자신은 마스터피스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타인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이. 같은 생계형 작가로 비교하자면 전자는 도스토예스프스키이고, 후자는 필립 K.딕이다.
삶을 향한 질문 중 가장 쓸데없는 질문은 '만약'으로 시작하는 가정이다. 알면서도 필립 K.딕은 그런 가정에 수없이 대입하게 되는 작가인데, 필립 K.딕이 그토록 가난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소설을 썼을까, 자꾸만 가정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게 문학적으로 결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그의 소설 속 SF적인 상상력이 너무나 천재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천재성은 그의 상상력이 SF소설과 SF영화 전반에 영감을 주는 데서 빛을 발하는데, 그의 문학적 엉성함과 완벽한 상상력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2차 창작물로 가면 한층 완벽해지는 놀라운 '진화'를 보여준다. 필립 K.딕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원작보다 뛰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석이 누군가의 가공을 통해 멋진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원석을 가공해 새로운 작품을 보여줄 재능있는 인물들이 수두룩하니 널렸으니 지켜보는 입장은 그저 즐겁다. 그러므로 필립 K.딕은 거장이고 천재이며 거기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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