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태워라 > 설(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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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s Casket
Review 1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4637 bytes / 조회: 1,000 / ????.03.24 13:39
원고를 태워라





V.나보코프의 신간『오리지널 오브 로라』의 표지를 보는 순간『말하라, 기억이여』가 떠오르는 건 뇌의 기억세포가 제대로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장하다 회색뇌세포!)
나보코프의 나비 채집에 대한 열정이야 워낙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그렇다고 표지마다 '나비'를 박아넣는 건 너무 도식적이지 않은가 말이지. 출판사 편집진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지, 생각은 했지만 무소용이었는지 뭐 여하튼 표지를 보고 한숨이 나오는 건 내 몫인가봉가. 
'도식적인'하니 문득 떠오르는...
한때 외국 유수 영화제에 참가하는 국내 여배우들은 공식처럼 한복을 차려입었는데 그 장면을 TV로 보면서 닭살 돋았던 건 나뿐인지. 모르긴 해도 여배우들이 모두 좋아서 한복을 입지는 않았을 거다. 영화제가 미스유니버스 대회도 아니고.

고래로 작품보다 먼저 사망한 작가가 유고를 태우라는 유언을 남긴 사례는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유언이 지켜진 예는, 특히 명성을 누리는 유명작가의 '원고를 태워라'가 지켜진 예는 내가 아는 중에는 없다.
이번『오리지널 오브 로라』역시 죽기 전에 완성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한 나보코프가 원고를 태우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물론 다른 대부분의 작가의 유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보코프의 아들 역시 원고를 안 태우고 곱게 보관하다 곱게 출간했다. 이런 경우 유족들의 출간의 변은 늘 한결같다. '작가 역시 원고가 이대로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건데. 장담하건데 카뮈는 서랍 구석에 찌그러져 끼어있던 '행복한 죽음'을 절대로.절대로. 출간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데에 100원 건다.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고 안 좋아도 유고의 가치가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고, 작가의 작품에 목마른 독자 입장에서야 밑져봐야 본전이고 일단은 환영할 일이지만 온라인서점에서 미리보기로『오리지널...』의 머리말을 읽다가 - 고인의 육필원고를 정서하고 편집한 고인의 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가 썼다, 내용 말미에 드미트리가 나보코프의 원고에 손을 댔다는 대목에 이르면 '헐'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정확한 본문은 '약간의 교정 및 편집을 가할 때'라고 쓰여있다. 이 무슨 지렁이 장독에서 미끄러지는 소린가. (원문: …the bits of editing I dared performed.)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는 얼마나 쉽고 간단한 예시인가. 글이라는 건 마침표 하나에도 영향을 받는 게 동서고금이 똑같은데 하물며 교정과 편집이라니.
부제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창작노트'이고, 책 본문도 나보코프의 육필원고인 인덱스 카드의 이미지와 본문이 함께 등장하는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굳이 고인의 아들이 원고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 나보코프는 평소 인덱스카드에 원고를 쓰고 카드를 빼거나 첨가하는 식으로 수정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랄까, 드미트리에 의하면 '아버지가 꿈에 등장해서 원고를 출간하라'고 했다는데 이쯤 되면 자식이 웬수구나 싶다.

평소 미신에 회의적인 M에게 드미트리의 꿈 얘길 들려줬더니 돌아오는 대꾸가 이렇다.
"꿈에 나왔을 수도 있겠지. 아버지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나보코프를 좋아하지만, 그러니 결국 이번 신간도 사겠지만 드미트리의 '편집, 교정' 발언이 굉장히 무례하고 경솔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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