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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479 bytes / 조회: 1,061 / ????.11.29 01:32
역자의 정성이 감동스럽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쩌다 대출기한을 넘겨버린 테리 이글턴과 망구엘의 책을 완독하든 안 읽든 어쨌든 이번주에 반납할 작정으로 열심히 읽고 있다.
이중 결국 주문시기를 놓친 망구엘의 <일리아스와...>는 무려 세번째 도서관대출인데, 대출-살거야(안 읽고 반납)를 반복하다 다른 책을 사느라 정작 이 책은 주문 순서에서 밀리고 말았다. 그와중에 또 놀라운 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나만 대출하고 있다는 사실.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책가늠줄이 내가 꽂아둔 그대로 변화가 없다. 그러니까 여태 나 혼자 세 번이나 대출-반납을 반복해온 것. 아니, 이렇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책을 도대체 왜 관심조차 안 가지는 것이냐고...

참고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파리스 왕자가 헬레네를 납치하면서 벌어진 트로이 전쟁(아킬레우스의 활약)을 다루고 있고,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험난한 커밍홈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지상의 인간들의 싸움에 올림포스 신들이 반으로 편을 갈라 끼어들면서 영웅들과 신들이 펼치는 온갖 종류의 막장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10년에 걸친 전쟁의 서막이랄 수 있는 헬레네 납치의 주범인 파리스가 실은 헬레네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다만 어느 유부녀가 세기의 미인이라는 소문만 듣고 무작정 월담했다는 기막힌 배경이 깔려있다는 사실. 물론 이 배경 이전에 그리스의 세 여신이 최고의 미녀를 가리는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일화도 있다. - 최고 미인이 사과를 차지하는 유치한 '골라봐'사건을 좀 더 풀면, 아프로디테가 최고의 미인으로 뽑히자 질투에 사로잡힌 헤라와 아테네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것인데 덕분에 트로이 전쟁은 사과 한 알 때문에 벌어졌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도 있다만, 번역에 분노한 경험은 있어도 감동한 적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바로 망구엘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 얘기인데.
직전에 테리 이글턴의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판을 위하여>을 읽다가 내팽개치고 집어든 이 책은 우연처럼 이글턴의 책이 뭐가 문제였는지 전광석화와 같은 깨달음을 준다.
보기드물게, 자아도취가 물씬 풍기는 '서문'으로 사람의 기를 반쯤 빼놓더니 본문은 아예 정신을 쏙 빼놓는 이글턴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저자가 아니라 역자였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턱없이 부족한 주석'이다. 언어의 기호학적인 기능을 표의(문자)와 표음(음성)으로 나누고 명제를 세운 다음 T.S.엘리엇과 리비스를 등장시켜 그것을 증명하는 구성으로 전개되는 본문은 결국 '알레고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독서를 멈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를 펼쳤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역자의 역주가 이렇다.

*알레고리: 우의(寓意). 은유법은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되어 있다. 

그런데 <벤야민 또는 혁명>역자는 동일한 의미의 우화(寓話)와 알레고리를 번갈아 씀으로써 독서를 혼동시킨다(불행한 얘기지만 내게만 국한된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이고, <일리아스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자의 번역은 그야말로 성실하고 정성스럽다. 알고 부르는 노래와 악보만 외워서 부르는 노래의 차이처럼 망구엘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목적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번역한 것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십대후반에 일하던 중고책방에서 만난 보르헤스의 영향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 망구엘의 책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제 선호작가에 보르헤스, 망구엘에 역자 '김헌'도 추가해야겠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역자의 책을 몇 권 더 사두었을 것을, 당분간은 책을 구매하지 않을 생각이라 많이 아쉽다.

* 가지고 있는 이글턴의 <비평과 이데올로기>는 내용이나 순서 상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판을 위하여>의 전신인데 확인해 보니 다행히 역자가 다르다. 출판사도 인간사랑이라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나저나, 새로 찍는다는 내 아카넷 책은 재발간일이 연기됐다는 메일이 왔다.
모두 네 권인데 이러다 절판되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니 동친이 '그럴리가 없다'고 확실한 부정으로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은 게 역시 불안하단 말이지. 어차피 주문할 거 아카넷 1차 주문 때 같이 할 걸 왜 미뤄가지고... 생각해보니 16일 주문 책도 재발간 메일이 왔구나.--;
인간적인 이기심으로, 혼잣말이지만 이런 읍소도 슬쩍 해본다. 절판하더라도 내 책은 보내주고 하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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