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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8626 bytes / 조회: 987 / ????.02.08 20:56
갑자기 책


갑자기 일본작가의 소설이 읽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치솟아서 온라인서점에 접속해 장바구니에 막 담았어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던 중입니다. 마루야마의 수필『소설가의 각오』를 샀던가 안 샀던가 기억이 애매한 거예요. 이럴 때만 부지런해지는 전 거실과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책장을 뒤졌지만 결국 책을 찾지 못했어요. 홈 게시판에서 검색해도 안 나오고. 마지막으로 확인할 방법은 서점에 접속해 주문 검색을 해보는 건데 가입 서점이 여러 곳이라 엄두가 안 나고. 결국 주거래 세 곳만 해봤는데 역시 검색에 걸리지 않는군요. 아마 고민만 하다 주문을 안 한 듯 싶어요.

 

::후일담.

소설가의 각오』찾았습니다.​ 그나마 제가 내세울만한 자랑이 '내가 본 영화, 산 책은 기억한다-' 거든요. 분명히 샀는데, 하다 좀 전에 갑자기 책장 위치가 떠올라서 돌아보니 옙, 그 자리에 있군요. 아, 답답해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ㅠㅠ

 

두 일본작가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고 신간을 둘러보다 장정일의 신간을 발견. 아. 이건 무조건 사야지.

 

그리고 생각나서 정여울을 검색하니 모르는 새 신간이 나왔더군요. 출간일이 15년 5월이니 그동안 내가 어지간히 무심했구나 합니다.『헤세로 가는 길』을 비롯 정여울의 책 두 권을 더 담고. 헤르만 헤세를 검색하니 새삼 현대문학에서 나온 헤세 선집이 눈에 걸리는 거예요. 이거 도서정가제 개정 전에 살까 말까 고민하다 안 산 건데. 헤세는 저의 고딩시절을 함께 했던 작가예요. 문제는 당시에 너무 열심히, 열광적으로 열중했던 탓에 제겐 일종의 burn out이 되어버린 작가라는 건데요. 스무살 때 헤세의 소설로 거의 논문에 가까운 글을 써서 대학 동기 남사친에게 보낼 정도였으니 헤세를 향한 제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하죠. 그렇듯 완전히 불태워 연소시킨 탓에 스물 이후 헤세는 제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무정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여울의 헤세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꺼졌던 불씨가 반짝 불꽃을 피우는 느낌이랄지. 결론은 책을 살 땐 고민하면 안 된다는 거, 일단 지르고 봐야 한다는 거. 기승전지름.

 

책을 담다 보니 보관함에 모아놓은 시집이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그김에 시집을 둘러보던 중 김남주 번역 시집 중 절판된 책이 눈에 띕니다. 아, 이거 내 책장에 있는 건데 절판됐구나, 못된 심보로 신나하다가 내친 김에 김남주 시인을 검색하니 창비가 시전집을 낸 걸 발견했습니다. 김남주는 이 시대 가장 격변기에, 그에 어울리는 격변의 삶을 살다 간 시인으로 그의 시는 운동권 노래 가사로도 많이 쓰였던 만큼 모두 하나 같이 그 치열했던 현장을 담고 있지요. 그렇다고 저항시만 썼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가에겐 예술 그 자체가 삶의 존재 방식이니까요.

시인이 자유롭지 못한 세상. 그런 세상이 우리 역사에, 그것도 머지 않은 현대사에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오늘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지켜온 가치인가를 상기해보면 이젠 노년이 되어버린 기성세대의 아집과 불통이 새삼, 참,... 서글프죠.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作. 김남주

 

아, 견물생심이라고 김남주 시인의 시전집, 평전, 산문집을 다 사고 싶네요. 박노해의 책도 읽고 싶고 오랜만에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도 다시 읽고 싶고.

여담이지만 발라드 명곡은 메탈 그룹에서 나오듯, 사랑詩도 실존주의 작가들이 쓰면 일단 정서 자체가 달라집니다. 표현 방식의 차이인가 싶지만, 에두르지 않고 곧장 들이대는 비리고 날 것의 직설화법이 사랑을 달콤한 것이 아닌 고통스러운 것으로, 뜨거운 것이 아닌 차가운 것으로,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방심한 마음 앞에 휙 던진다고 할까요. 그러면 방심한 마음은 그저 휘둘리는 수밖에.

 

14.11.23일 이후 책을 안 사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은 이후 갑자기 책을 좀 살까, 하고 온라인서점을 뒤지게 된 계기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손바닥 소설』이에요. 이건 소설도 뭐도 아니야, 라고 절반쯤 읽고 던져버렸던 책인데 갑자기 그때 읽었던 문장들이 막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취향이 아니야, 라고 두 번 다시 안 볼 것처럼 던져버렸던 책이 시간이 지나 막 생각이 나고 읽고 싶어지는 때가.

취향이 변한 건지, 단순한 변덕인지.

게다가 머피의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지 하필 연휴라니. 즉슨 지금 책을 주문해도 적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읽을 수 있다는 얘기.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그것도 당일배송이 완전히 정착된 요즘 같은 때에 참 피말리는 시간인데요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되겠지만 안 그래도 도서정가제 시대에 10%할인과 쿠폰, 사은품을 저버릴 수야 없죠.

하지만 그것도 이틀째가 되니 열망이 처음보단 시들하네요.

사람 심리라는 게 참 묘하죠. 집에 잔뜩 쌓여 있는 책들 다 놔두고, 당장 내 손에 없는 책에 이렇게 목 매는 걸 보면.

잡은 물고기 이론이 아주 그럴싸하다 싶기도 하고.

 

얼마 전에 '8조가 생긴다면'이 잠깐 유행했는데, sns에 올라왔던가 어느 네티즌의, 8조가 생기면 버스 탈 때 현금승차하고, 피씨방에서 비회원으로 게임하고, 부대찌개 먹을 때 햄사리 두 번 추가해 먹어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그런 내용인데 보다시피 내용이 워낙 소박하다 보니 '8조 댓글'이 줄줄이 달리면서 화제가 됐던 걸로 기억해요. 근데 다시 읽어보니 묘하게 울컥하는 것이, 웃픈... 딱 그런 기분. 되새길수록 '웃'은 작아지고 '픈'이 커지는 묘한 울림이 있군요.

여튼, 8조는 됐고 800억만 있으면 국내외 전작주의 작가의 모든 책과, 지구 상에 흩어져있는 모든 희귀본과 초판본, 한정판 책을 다 구해서 개인도서관을 만들텐데... 했는데. 했지만서도, 생각해 보니 8백억으론 부족하고 8천억은 있어야 되나 싶은 것이. 으잉. 8조가 생각보다 큰 돈이 아닌 듯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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