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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4437 bytes / 조회: 1,148 / ????.08.08 16:09
파격을 파하지 못함


 

 

첫번째 꼭지 '심청'을 읽고 잡설.

 

'파격'과 '고전'이라니 역설적인 조합이 재미있다. 아마 저자도 그런 효과를 바란 것이겠지만, 문제는 정작 저자는 '파격'을 쫓아가는 게 버거워 보인다는 것.

 

'효녀 심청'은 길동이의 호형호제만큼이나 오랫동안 박제된 프레임인데 저자가 효녀와 심청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정작 골대 앞에서 자꾸 헛발질 하는 느낌.

 

장승상 댁 부인이 3백석을 대신 변통해주겠다 하고, 눈먼 아비가 못 보낸다 눈물 바람으로 붙잡는데도 기어이 뱃사람을 따라 나서는 심청. 그 이유도 가당치 않다. 뱃사람과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않으면 그들이 곤란해진다는 것. 이쯤되면 얘 어디 모자란가, 싶겠지만 심청에게서 '효녀'를 떼면 효녀 뒤에 가려진 진실이 보인다.

저자의 헛발질은 여기서부터. 심청이 왜 피할 수 있음에도 인당수에 뛰어들겠다고 고집을 부렸을까 기껏 의문을 던져놓고는 뜬금포 작중의 요소에 메타포를 부여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인당수에서 심연을, 맹인잔치에서 탈영토화를, 연꽃을 탄 심청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서 탈윤리를 끄집어내는데 그야말로 뭥미? 싶다. 참고로 모두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행위가 효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건 좋았으나, 뒤이어 이를 '극단적 효행'으로 규정함으로써 저자는 결과적으로는 심청과 효녀를 분리하는데 실패한다. 저자의 말을 빌면 '파격'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늙고 눈먼 아버지는 철이 없고, 아버지가 기댈 곳이라고는 오직 어린 저 하나인데 이제 겨우 열다섯인 청이 입장에선 도통 미래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효녀'로 방방곡곡 소문났으니 싫으나 좋으나 이 어린 소녀는 계속 효녀여야 한다. 그런 청이에게 인당수가 혹 탈출구는 아니었을까.

용왕과 옥황상제의 도움으로 심청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국 맹인잔치를 연다. 저자는 맹인잔치의 의미를 맹인을 집 밖으로 불러낸 탈영토화로, 심학규가 맹인잔치에서 눈을 뜬 것을 기존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런 메타포 해석보단 심청이 어찌하여 맹인잔치를 열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공양미 3백석에 팔려간 심청은 왜 경로잔치가 아닌 맹인잔치를 열었을까. 심청은 제 아버지가 눈을 뜨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식자우환이랄까. 이따금 생각하는데 들뢰즈가 인문학적 지성의 저변을 확장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건 참 감사한 일이지만, 한편 식자들이 지나치게 들뢰즈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을 너무 자주 본다. 천개의 고원을 넘지는 않고 봉우리 높이만 재본 게 아닐까 싶은 지식인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보다 보면, 너무 거대한 지성은 오히려 어설픈 식자를 낳는 '악화'인가 싶을 정도.

한 예로, 굳이 인당수를 '모든 것이 유동적인 액체적 공간'으로 해석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심청전의 작가는 들뢰즈의 '들'자도 모를 텐데. 심청전에서 중요한 건 오직 하나, 공양미 3백석이 사기인 걸 알면서도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지만 효녀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던 소녀가장 심청의 가난한 선택이다. 

 

뱀발_

들뢰즈가 moral과 ethic을 도덕과 윤리로 구분하고 행위의 결과를 도덕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으로 해석했다는 각주가 재미있다. 각주 내용은 도덕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윤리적 행위는 좋다와 나쁘다로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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