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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411 bytes / 조회: 860 / ????.06.25 14:42
의식의 흐름에 따른


:: 박범신, 이응준, 허수경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한동안 박범신을 읽어치울 때가 있었다. 말그대로 '읽어치웠'는데 그런 작가가 있다. 그의 글을 읽자면 전투적이거나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너 글이야? 덤벼! ...왠지 읽고나면 정신을 자학한 것 같은 허무감이 든다.

여튼 번아웃됐달지, 그렇게 읽어치우고 나니 관심이 뚝 끓어졌고 이후 박범신의 신작이 나와도 '나왔는가 보다' 심드렁했는데 새벽에 갑자기 박범신의 글에 갈증이 확 일었다.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예전에 먹었던 음식이 먹고 싶거나 예전에 갔던 곳에 가고 싶거나 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박범신이었던 건 아니고 이응준의 신작이 나왔길래 장바구니에 담다가 박범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예전에 주문했다가 책상태가 너무 메롱해서 교환요청했으나 해당서점 사정으로 반품하고 이후 잊어버렸던 허수경까지. 이응준의 책을 담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박범신에 허수경까지 담고 나니 문득 아, 나는 울고 싶었나- 싶었다. 박범신은, 허수경은 나한테는 그런 작가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근데 나 안 울고 싶었는데?

 

 

:: 주의자(-ist)는 아니지만

박범신의 소설이 생각보다 품절이 많아서 좀 놀랐다. 특히『외등』은 왜? 싶었다. 한편으로 내 책장에 잘 꽂혀있는 책을 보면서 흐뭇한 이율배반적인 감정.

지난번 성추행 발언 파문의 여파인가 싶기도 하고. 출판 사정이야 모를 일이지만. 당시 배석했던 인물들이 해당작가를 두고 비난과 옹호로 상반되는 주장을 했다는 기사까진 봤는데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그런 주장들에 대해 M은 그런 말들(=음담패설)이 나온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라고 했다. 다행히 내 주변 남자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상식인들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내가 아는 바운더리(이대 출신 여성학자들) 안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하지만 페미니즘은 관심이 있다. 따지고 보면 다른 여타 '주의(主義)'도 마찬가지인데 '주의자'는 아니지만 '주의'는 관심이 많다. 각설하고.

이따금 내가 순결주의인가 스스로를 의심할 때가 있는데 바로 연애소설을 읽을 때다. 첫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한 사람만 사랑했으면 좋겠고, 첫사랑이 끝사랑이었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등등 종이인간들의 연애사에 안달복달 한다.

장르소설이야 '사랑 지상주의'라 결혼 뿐 아니라 연애조차도 일부일처에 더해 첫사랑이 끝사랑이 공식이라 안심하고 읽지만, 본격소설은 이 공식이 별무소용이라 잘 읽다가 뒤통수 맞고 멘붕이 오기 십상. 박범신이 대표적이다. 이 작가의 소설 속 연애는 장르소설 뺨치게 독자의 여린 멘탈을 쥐고 흔들다 못해 때려부술 기세.『외등』이 대표적이다. 인물 구도도 그러한데 하물며 문장마저 온 몸을 두들기면서 부딪쳐오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 한 권을 읽고 나면 머리로 읽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읽은 기분에 얇은 몸살을 앓은 듯한 착각이 든다.

생각지도 않았던 박범신의 책을 담다 보니 그의 신작 근황도 알게 되었다. 신작이 대만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국내에선 찍어놓고도 풀지 못하고 있다고. 문단 스캔들이라는 게 원래가 녹록치 않다. 난 옛날부터 들은 얘기가 워낙 많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의외로 작가를 향한 독자의 환상이 신급, 제왕급인 모양. 남작가의 성희롱에 난리법석이 있었지만 아는 체 하자면 여작가나 남작가나 별 차이가 없다. 문단이 어떻게 노는지 실체가 까발려진다면 그날이 바로 국내 출판업계 사망 선고일이 될 것이라 감히 예상한다. 아, 해외문학도 있으니 업계 사망까지는 아닐 수도.

 

 

:: 소유냐 공유냐

'소유냐 공유냐' 쓰고 보니 마치 '씨스타냐 도깨비냐'하는 것 같아 혼자 웃음.

밤에 책을 주문하다 말고 창을 닫아버렸다. 사실은 엔프로텍터 때문에 열받아서 주문창을 꺼버렸다. 지난주에 포맷을 했더니 뭘 좀 하려고만 하면 설치를 강요하는 창이 뜬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EXE' 다. 망할. 문통이 아예 익스플로어 플러그인을 없애겠다고 No plugin 대선 공약을 했는데, 뿐만 아니라 공인인증서와 액티브엑스를 ICT적폐라고까지 하심, 여튼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각설하고. 요는, 아침에 일어나서 온라인서점에 접속하다 말고 도서관 홈에서 검색해보니 장바구니에 담은 책이 다아~ 있다. 모두 대출가능, 하물며 여긴 책도 깨끗하다. 음... 고민. 이사할 때 책 박스 싸던 경험이 무시무시하긴 했지. 내가 이북리더기를 검색할 정도면 말 다한 거다.

이쯤에서 소유에 대해 생각한다. 책을 갖고 싶은 건지, 글을 갖고 싶은 건지. 어쨌든 책의 가치는 '내용'에 있으므로 내용을 아는 것=읽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한다면 광의(廣義 )로는 사서 읽든 빌려서 읽든 둘 다 소유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책을 빌려서 읽으면 소유한 게 아니라 공유한 느낌이 든다는 게 문제. 점유자가 내가 아닌 이상 공유는 내 것이 아니므로 썩 무리한 생각도 아니다. ......결론은 활자중독증 남자랑 결혼해야겠다- 인 걸로.

새벽에 주문해버렸으면 이런 쓰잘데기 없는 고민도 안 하는데...7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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