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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2675 bytes / 조회: 809 / ????.07.12 00:13
부족했던 거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야만'이라고 선언했고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일이 가능한가' 질문을 남겼다. 아우슈비츠가 유럽 현대사에 남긴 비극의 족적은 유사한 비극을 겪은 분단국가에 사는 나조차도 좀처럼 가늠이 안 된다. 하긴 내 나라의 비극도 기록필름을 통해야만 실감하는데 오죽하겠는가만은.

 

문학은 그렇지 않은데 詩를 고르는 취향은 좀 많이 까다롭다. 사실 문학은 취향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잡식성인데 반해 시는 소나무 취향이다. 날카롭고 정제되고 제련된 날 것의 싯구를 좋아하고, 그래서 아끼는 시집을 들여다 보면 저자 대부분이 실존주의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시인들이 서양의 시인들보다 취향에 가깝다. 우리 언어로 잉태되어 태어난 시들은 원고지를 꾹꾹 눌러 쓴 것 같은 곡진한 질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끔 가뭄이 든 땅이 물을 필요로 하듯 서정시를 허겁지겁 찾을 때가 있다. 주로 내 안의 낭만이, 로맨스가, 십대 감성이 이제는 완전히 죽어버렸는가 덜컥 겁이 날 때다. 

 

시인 박 준의 산문이 예판을 받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놓고도 주문 클릭을 미루고 미루고 미룬 이유는 책 값이 너무나 상업적이어서였다. 비싼 책 값에는 양장 장정과 역시 양장 힐링노트와 북마크와 작가 사인이 사은품으로 포함되었다. 사은품을 감안하면 딱히 비싸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냥저냥 주문해도 괜찮았을 텐데 주문을 미루던 어느날 아예 장바구니에서 빼버린 이유는 내용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TV예능을 통해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계기가 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는 분명 참 좋았다. 좋아서 친구들에게 좋았던 부분을 읽어주기도 했다. 하물며 나는 시인이 쓰는 산문을, 조금 과장하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다. 그런데도 주문을 포기한 이유는 결국 작가가 문제였던 거다. 알맹이에 대한 정보 없이 작가에게 지갑을 열기에 사은품과 괜찮았던 전작 정도로는 부족했던 거다.

 

작가와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예외도 있지만 그런 작가는 드물다.

박준의 신간 미리보기를 읽다가 괜스레 허수경의 시집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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