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예능 <뜨거운 사이다> > 설(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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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8039 bytes / 조회: 993 / ????.08.19 23:08
여성 예능 <뜨거운 사이다>


박혜진 전 앵커를 좋아해서 새 프로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일부러 찾아서 본 <뜨거운 사이다>는 첫 회부터 제목처럼 뜨거운 이슈를 낳았던 모양이다. 여성PD, 여성작가, 여성패널이 만드는 '여성 프로'임을 내세워서인지 내용 중에 반대급부에 있는 종영 프로 <알쓸신잡>이 언급되었다. 이 부분이 특히 이슈가 되었던 것 같은데, 사실 이 내용을 포함해 3분의 2쯤 보다가 꺼버렸기 때문에 프로그램 전체에 대해선 달리 할 말이 없다.

 

<뜨거운 사이다>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건 사회관계망에서 여성과 남성이 취하는 태도의 특성을 새삼 확인한 것인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사회관계망에서 여성은 공감욕구를, 남성은 인정욕구를 욕망하는 차이가 이 방송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제작진이 선별해서 고르고 구성한 만큼 다섯 명의 패널은 나름 자기 분야에서 나름 전문가인데 토론? 대화? 중에 대개 여자들이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 사람이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에 동조하거나 공감하는 제스처를 하는 것으로 바로 '공감욕구'다. 누군가 의견을 얘기하고 주장을 할 때 그래그래, 맞아맞아... 하는 거다. 이견을 얘기할 때조차 적극적이지 않고 '네 말도 맞지만...' 단서가 붙는다.

타인에게 정서적 감응을 하는 공감욕구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감정적 활동이다. 문제는 공감만 하다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장 A에 a1, a2, a3만 펼쳐지는 거다. 이런 식이면 대화의 주제가 확장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주제의 변두리는 커녕 A의 주장 근처만 배회하다 끝나게 된다. 즉 다섯 사람이 떠들었는데 남는 건 한 사람의 주장 뿐이다.

 

첫방송부터 이 프로를 이슈로 만든 '알쓸신잡' 언급을 보면.

한 패널이 '알쓸신잡'을 불쾌한 방송이라고 좌표를 찍는다. 이유는, 자기도 주워들었으면서 강의를 하려고 드는 회사 꼰대 상사 같아서라는 거고, 그래서 '알쓸신잡'은 가장 피하고 싶은 프로라고 한다. 응???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반론 혹은 다른 생각을 얘기하는 패널이 한 명도 없다는 거다. 물론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만.

'주워들은 얘기'라고 단정하기에는 <알쓸신잡>의 출연자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 나름 전문성을 가진 이들이다. 하나의 사물을 놓고 다섯 사람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습득하고 공부하고 고민한 의견을 나누는 포맷이다. '녹두장군 전봉준' 하나의 키워드를 두고 다섯 개의 시선이 교환되는 것이다. 거기엔 식문화에 의한 시각도 있고 역사적인 시각도 있으며 문학적인 코드도 있다.

이것을 그저 상사로부터 부하직원에게 수직적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강연이라고 단순 치부하는 것에 먼저 놀랐고, 그것에 이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더더욱 놀랐고.

 

다음, 여성 연예인이 예능에 출연하면 남성 출연진이 애교를 요구한다는 부분.

이 장면에선 예능작가의 90프로가 여성이라는 김숙의 발언이 신선했다. 직전에 폭력적인 여성의 성상품화라는 기조로 대화가 일방적으로 전개되던 시점이라 더 참신하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에서 이 프로의 한계점이 노출된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왜 여성작가가 그런 대본을 쓰는가로 주제가 넓혀져야 되는데 언감생심, 작가가 여성이라는 얘기에 국장님이 남성이라는 발언이 나오고 그 주제는 그걸로 종결된다. 아몰랑 결론은 '여성성상품화'인 거다. 한마디로 이들 대화엔 왜?가 없다. 그러니 토론이 안 되고 수다에만 머무는 것이다.

 

알쓸신잡이면 이 장면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왜 여성작가가 그런 대본을 쓰게 되었는가, 방송 환경과 방송 시청 소비자의 역학관계, 방송이 성상품화를 자발적 수용하는 배경, 나아가 부계 모계 등 다양한 시선이 교환되었을 거다.

굳이 전문적이고 어려운 현학적인 얘기를 하라는 게 아니다. 이건 여성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연예인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태도, 나아가 성을 소비하는 사회의 태도의 문제다. 애교를 요구받는 여성 연예인이나 몸 좋은 남성연기자의 샤워씬이 빠지지 않는 드라마나 사정은 다르지 않다는 얘기. 패널들 중 누구 한 사람은 이런 인문학적인 얘기를 꺼낼 줄 알았으나 나오는 거라곤 역시 공감 뿐. 

 

주장의 근거와 전개가 이런 식이면 결국 상황에 대한 이해는 밀려나고 행위의 주체에 대한 공격만 남는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여자라면? 강연을 하는 사람이 여자라면? 계약에 없는 내용을 요구하는 감독이 여자라면? 어쩔 건가.

정말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것은 행위를 하는 주체의 성별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를 생산하고 방임하고 묵인하는 사회적 역사적 인문학적 배경이다. 이러한 배경에 대한 고민과 통찰 없이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것인가.

 

젠더를 담론의 장으로 끌고 나올 때는 보다 깊은 고민과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해야 한다. 젠더는 '인간'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남성을 제외한 여성, 여성을 제외한 남성으로 젠더 얘기를 하겠다는 건 인간은 돌과 흙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여성운동은 성공한 여성들의 점유물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을 안다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깊은 고민을 했다면 <뜨거운 사이다>의 출연자들이 이 프로는 '여성 예능'이라고 그토록 당당하게 떠들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자신의 어떤 부분이 해당 방송의 패널로 선정되는데 어필되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 사회적 약자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자신이 누리는 혜택의 배경부터 먼저 고민해보시길.

 

이 방송을 보면서 패널들의 직업에서 비롯된 전문성에 감탄할만한 대목-장면이 있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아니올시다- 대답하겠다. 반면 그녀들이 기피한다고 이구동성(침묵했던 이들 포함)했던 <알쓸신잡>은 과학자, 소설가, 맛칼럼니트스, 지식소매상이 자기 분야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매순간 들을 수 있었다.

 

혹시 <뜨거운 사이다>에 대화 주제를 제시하는 기회가 생긴다면, 패널들에게 이런 주제를 한번 던져보고 싶다.

1. 당신은 예쁘다는 칭찬과 일 잘한다는 칭찬 중 어느 것에 더 기쁨을 느끼는가.

2. 1의 대답과 어려 보인다는 얘기 중 어느 것에 더 기쁨을 느끼는가.

3. 능력과 미모와 나이 중 하나만 고른다면.

4. 백설공주 계모는 자기보다 어린 백설공주, 자기보다 예쁜 백설공주, 자기보다 능력있는 백설공주 중 무엇에 본질적인 질투를 느꼈을까.

5. 이상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자아의 기저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 참고로 위 4지는 남초사이트에서 남녀만 바꾸고 'vs'로 늘상 올라오는 질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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