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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308 bytes / 조회: 990 / ????.04.08 03:10
순결주의의 희생양 '에밀리아 길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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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고 있는 책은 독일 문학 번역가 홍성광의『독일 명작 기행』인데, 도서관에서 두 번째 대출한 책이다.

대출해놓고선 읽을 시간이 나지 않아 반납했다가 재대출했는데 첫 대출 때도 생각했지만 역시 책을 사서 내 책장에 꽂아두고 읽고 싶을 때마다 꺼내읽어야겠다 싶다.

 

개인 취향이지만 책 제목에 '기행' '명작'이 들어가면 관심이 급식는다. 한마디로 도서관이 아닌 서점에서라면 눈길도 안 줬을 책. 나같은 독자가 분명 꽤 될 텐데, 물론 같은 이유로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독자도 분명 있겠다만, 혹시라도 연암서가가 재간 생각이 있다면 책의 제목을 바꾸어볼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판매량이 쑥 올라갈 거라는 데 100원 건다.

말이 나온 김에, 세일즈도 세일즈이지만 독자를 위해서도 출판사는 책의 제목을 결정할 때 꼭 고려해주길. 고작 제목 탓에 취향인 책을 놓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잡설이 길었는데,

이 책의 두 번째 목차는 레싱의 시민비극「에밀리아 갈로티」인데, 여기서 중요한 건 '시민 비극'이라는 개념이다. 유럽의 비극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을 철저하게 귀족계급(=지배계급)의 서사에만 적용했는데 이걸 시민 계급(=피지배계급)으로 옮겨온 것이 레싱이다. 그리고 그 대표작이「에밀리아 갈로티」이고.

늘 그렇듯 줄거리는 간단하다.

 

백작 아피아니와 결혼을 앞둔 평민의 딸 에밀리아에게 반한 영주 곤차가는 시종장 마리넬리에게 의논하고 마리넬리는 계략을 꾸민다. 그리하여 혼례식장으로 향하던 마차는 사고를 위장한 습격을 당하고 그 와중에 신랑 아피아니는 사망한다. 에밀리아는 근처 곤차가의 별궁으로 옮겨지고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 오도아르도는 곤차가에게 버림 받은 정부의 고자질로 이것이 곤차가와 마리넬리의 흉계임을 알게된다. 그리고 오도아르도는 에밀리아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 에밀리아를 살해한다.

 

간단한 내용인데 관점의 깃발을 어느 언덕에 세우는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정치적 관점.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게 폭력을 가할 때 그로 인해 파생되는 비극은 온전히 피지배계급의 몫이다. 에밀리아는 결혼식날 신랑을 잃었으며, 오도아르도는 졸지에 사위와 딸을 잃었을 뿐 아니라 제 손으로 직접 딸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고, 주인의 명을 (너무)충실히 이행했을 뿐인 능력있는 시종장은 결국 사건 전말의 주동자로 누명을 쓰고 국외로 영원히 추방당한다. 지배계급의 꼭대기에 있는 영주 곤차가를 제외한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비극의 희생자가 되지만 곤차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회윤리적 관점.

에밀리아가 먼저 청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아비가 딸을 살해한 이유는 영주로부터 딸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다. 정조를 지키는 문제는 통상 명예를 지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즉 에밀리아를 죽임으로써 에밀리아의 명예를 지켰다는 거다. 이거 생각해보면 굉장히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테제인데, 명예(=정조)가 목숨보다 중하다는 순결주의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미담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여성에게 정신적인 정조대를 강요하고 있다. 수청 들기를 거부하고 옥살이하는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는 정조를 지킨 대가로 장원급제하고 금의환향한 이몽룡에게 인정받아 해피엔딩을 맞는다. 

이 소설에 국한하여 바람직한 결말은, 아도아르도의 칼은 에밀리아가 아니라 영주를 겨누어야 했으며 법정에 영주를 세웠어야 한다. 그도 아니면 칼을 스스로에게 겨누던가. 하지만 아도아르도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한다. 바야흐로 정의보다 명예의 가치가 앞섰던 시대의 비극.

 

 

*쓰고 싶은 내용이 두어 가지 더 있었는데 글을 한번 날렸더니 의욕도 같이 날아가서... 차후에 떠오르면 내용 보강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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