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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371 bytes / 조회: 870 / ????.04.16 12:01
사랑이여, 차라리 내게로 오라


그해부터 앵두꽃은 다섯 번이나 지고 둥근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도리어 멀리 있는 다른 집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청혼했으니 내일 큰 쇠가죽을 가지고 가서 그의 딸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꽃신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리라. 혼인날이면 가마 타는 대신 이웃집끼리니 우리 가족은 집에서 짠 하얀 베를 깔아 꽃신이 그 위를 밟게 할 것이다.
가을밤은 조용히 깊어 갔고 나는 차가운 뜰을 몇 바퀴 돌았는지, 그때 거칠고 취기 어린 신집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이 만든 비꼬는 노래에 곡조를 실어서 부르고 있었다.
"농부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가을날이 참 좋군요. 여보 신집 사람댁 호박은 잘 자랍니까?"
잠시 후 네모진 미닫이에 그림자가 지나갔다. 신집 부인이 남편을 마중하러 일어났을 거라 생각했다. 몸이 떨렸다. 부인이 남편에게 전할 내 청혼얘기를 듣고자 나는 울타리에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싸움소리가 들려온다. 미닫이는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것처럼 확 열리며 노기 띤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딸은 백정네 집 자식에게 안 주어!"
나는 그 다음 말을 들을 때까지 내 귀를 의심했다.
"백정녀석에게 빚진 게 있다구 내 딸을 홀애비가 부엌뚜기 해먹듯 쉽사리 할려구 했지. 백정녀석이 중매쟁이 있다는 걸 알 리 있나. 내 딸은 일곱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꽃신장이 딸이야."
그 말은 그릇이 와그락와그락 깨지는 것 같았다. 부인은 말을 막으려고 미친 듯 소리를 질렀으나 남편의 큰 소리에 눌린다.
"쇠고기 덤이나 좀 있을까 해서 혀끝으로 한 좋은 말이 백정녀석 마음을 크게 했다. 나는 혼인식 때 신는 꽃신장이다!"
내가 기억한 것은 어머니가 내 팔목을 잡고 허덕이며,
"어떻게 하려는 거야."
나는 내 손에 백정 칼을 들고 대문간에서 떨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어머니는 칼을 빼앗았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힘이 센 줄은 몰랐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엄했다.
"너는 손톱을 가지고도 남을 해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우리 백정을 어떻게 생각하겠니?"
내 심장은 갈쿠리로 긁은 것같이 아팠다. 나는 내 팔을 깨물고 그 아픔을 잊으려 했다. 이것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쓰라림이라 깨달은 나는 땅을 치고 울었다.
 

- pp.19-21, 김용익「꽃신」(『사랑이여, 차라리 내게로 오라』에 수록)

 

 

가끔 '재미있는 소설'이란 뭘까 생각한다.

나는 과연 소설의 어떤 부분에서 오감의 자극을 받는 걸까.

 

어느 때는 서사가, 어느 때는 캐릭터가, 어느 때는 문체가... 재미의 제1 요소는 수시로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아마 읽은 책의 장르에 따라 재미의 요소도 바뀌었던 게 아니었던가 싶다. 즉 상대적인 잣대였던가 싶다.

 

2010년『순교자』로 뒤늦게 국내에 알려진 김은국, 강용흘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작가로 꼽혔던 김용익은 1920년에 출생하였고 1995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작가의 약력을 꼼꼼히 훑으니 여러모로 감상적인 여운이 남는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한다. 그리고 현지 강단에 서며 현지 언어로 소설을 쓰고 발표한다. 도중에 국내에 귀국해 강단에 서기도 하지만 그가 창작을 하는 주요 무대는 미국이다.

아름다운 문장이 주는 감동과 여운은 국적 불문인 듯, 영문「꽃신」은 시중에 나오자마자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선정되고 美 주요 매체에 소개되고 또다른 단편은 美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다.

 

다시,

소설을 재미있게 하는 요소에 대해 생각한다.

서사를 담고 문체를 구현하고 캐릭터에게 생명을 주는 문장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소설이, 문장이, 글자가 시들할 즈음이면 느닷없이 툭 튀어나오는 혹은 마주치는 이런 작가, 이런 소설 때문에 나는 또다시 활자와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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