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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450 bytes / 조회: 1,066 / ????.08.26 15:09
불취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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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 '불취불귀(不取不歸)'

 

 

첫 구절을 읽는 순간 내 마음을 단숨에 빼앗고 시인을 앓게 했던 '불취불귀'가 수록된 시집『혼자 가는 먼 집』은 1992년에 발행되었다.

이 시집을 낼 때 20대 후반이었던 작가는 어느새 50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먼이국땅에 정착한 작가는 15년 전에 냈던 산문집『길모퉁이의 중국인 식당』의 개정판『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로 돌아왔다. 작가가 아프다는 소식과 함께.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의 발행일이 18년 8월 8일이다. 이 날은 황현산 선생이 돌아가신 날이다. 암수술을 마치고 항암치료 중이라던 황현산 선생의 부음을 들은 게 지난주였다. 신간을 내신 근황에, 치료 잘 하고 계시겠거니 했던 터에 들려온 소식이라 많이 황망했는데 연이어 좋아하는 작가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기분이 가라앉는다.

 

작가는 아니지만 작가만큼이나 재기넘치는 비유와 은유로 무장한 촌철살인 입담으로 즐겁게 해주었던 노회찬 의원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이다.

 

동시대인으로 작가와 함께 세월을 걸으며 작가의 글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게 그리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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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눈으로 확인하기로 목차와 편집이 바뀌었고 내용은 그대로인 것 같다. 추가된 내용이 있는지는 아직 책을 읽지 않아 확인 못했다. 다만 개정판은 본문 뒤에 작가의 육필 원고 두 개가 추가되었다.

허수경의 글은 읽고 있노라면 단어마다 구절마다 깊이 밴 한숨이 느껴진다.

김훈이 연필을 꾹꾹 눌러 육신으로 글을 쓴다면, 허수경은 한숨을 꾹꾹 눌러 정신으로 글을 쓰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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