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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054 bytes / 조회: 919 / ????.01.18 02:08
골목식당 '피자집' 편을 보고


홍탁집인가로 그렇게나 시끄러웠을 때도 안 봤던 <골목식당>을, 연말에 반강제적으로 잠깐 본 것이 계기가 되어(이때는 고로케집을 봄) 이후 2회를 더 봤다. 2일 방송은 논란 이후 방송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봤고... 아마 나 같은 사람이 많았던 모양인지 역대급 시청률이 나왔다고 한다, 이번주(9일) 방송은 지난주에 방송이 안 됐던 피자집과 고로케집이 나왔다고 해서 역시 궁금해서 봤다. 일일드라마가 괜히 매 회 엔딩을 그렇게 뚝 자르는 것이 아님.

 

각설하고.

 

딱 피자집까지만 보고 화면을 꺼버렸기 때문에 이후 고로케집이 나왔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중간에 백선생이 방송의 공정성? 진심?에 대해 웅변하듯 얘기하는 부분도 건성으로 봐서 기억에 남는 얘기가 없다. 아, 하나 있다. "(우리를)고발하세요, (우리가)고발합니다" 이거.

나는 이번 기회에 백선생이 이 프로에서 탈출하길 바랐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프로그램에 애착이 많으신 모양. 백선생은 호감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어쨌든 나는 이 방송을 더이상 안 볼 생각이라. 그러므로 골목식당 얘기도 이게 마지막일 거라는 얘기.

 

이번주 방송을 본 후 해친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방송이 너무 잔인하다고 투덜댔더니 해친이 피자집 사장을 두둔하는 거냐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방송이 잔인하댔지 내가 언제..." 했더니 "(피자집이)안됐다며" 한다. 이번엔 내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내가?" 되물으니 "그래!" 한다. "어우야, 내가 미안해." 바로 사과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거다.

방송을 안 봐서 모르지만(통틀어 딱 3회, 그것도 띄엄띄엄 봤다) 커뮤에 올라오는 내용을 토대로 볼 때, 제작진은 가게 선정 때 이런저런 내부 기준 혹은 방침을 가지고 있고 그에 부합하는 가게를 섭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피자집과 고로케집은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고.

 

방송 전에 자료 수집 차원에서 수차례 사전 인터뷰를 갖고 심층 면접을 하는 걸로 안다. 그래야 대본을 쓰지. 여튼.

그러니까 요는, 제작진은 피자집 사장의 상황과 정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거라는 거다. 그리고 피자집이 방송에 나가는 순간 논란이 될 걸 충분히 예상했을 거고. 예상했던 논란의 범위가 요리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피자집 사장까지였는지, 건물주 아들까지였는지는 제작진만 알 일이지만 어쨌든 방송이 나가는 순간 아마 홍탁집 수준의 이슈를 낳고 화제가 될 거라는 건 예상했을 거고 그러길 바랐을 거다.

 

내가 잔인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이거다.

거듭 말하지만 피자집 사장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내가 분노하는 대상은 제작진이다. 홍탁집처럼 과정에서 온갖 원색적인 욕을 먹었을지언정 결국 대반전 드라마를 완성하고 현실에선 대박을 터뜨린 가게를 보면서 출연자는 '나도! 나도!'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다고 욕심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욕심을 이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어쩌면 인간의 민낯일 수도 있는데 그 민낯조차 자기네 컨텐츠로 이용하고자 했던 제작진의 자본주의적 논리가 역겨웠다. 피자집 사장이 어떤 욕심을 가졌든, 욕망을 가졌든 애초에 제작진이 섭외하지 않았으면 그만이다. 제작진은 알면서도 섭외했고,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고, 예상 못했던 일도 일어났고, 솔루션 중지했으니 원칙을 지켰다고 제작진은 손 털었다.

 

수학 시간에 있었던 일화다. 한 친구가 수업을 유난히 열심히 들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필기하면서 나름 리액션을 했던 모양인데, 갑자기 선생이 칠판에 문제를 쓰더니 그 친구를 호명했다. 열심히 수업 듣던데 나와서 문제를 풀어보라는 거였다. 그 친구는 호명되어 일어선 채로 얼굴이 벌개지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열심히 수업을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친구가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선생에게 보이고 싶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를 풀지 못할 걸 알면서도 친구들 앞에 학생을 전시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선생은 인격파탄자와 뭐가 다른가.

 

여담이지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정말 개사이코 같은 선생들이 많았다.

미술 시간에 실습 준비를 못해온 친구가 있었다. 빈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선생이 준비물을 안 챙겼으면 책이라도 꺼내고 있어야지 염치도 없다고 면박을 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역시 준비물을 못 챙긴 다른 친구가 책상에 책을 꺼내놓고 있었는데 선생이 이번엔 하는 말이 준비물을 안 챙긴 주제에 뻔뻔하게 책을 꺼내놓고 있느냐는 거다. 어후 개또라이.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자면, 시중에 도는 얘기처럼 실제로 피자집 사장이 얼마나 부도덕하든, 금수저든, 요리치든, 상도의가 없든 애초에 제작진이 섭외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지 못했을 거고 스트레스도 안 받았을 거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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