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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8963 bytes / 조회: 1,202 / 2021.05.16 12:47
생태주의의 유머스러움


우선 성서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성서에는 소가 여자나 남자를 죽이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베르나르 성인은 윙윙거리는 소리로 자신의 업무를 방해한 벌 떼를 파문했습니다. 벌들은 또한 816년에 독일 서부의 보름스 태생의 한 남자가 사망한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지방 의회는 그들에게 질식사를 선고했습니다. 1394년 프랑스에서는 돼지 몇 마리가 아이를 죽이고 잡아먹었습니다. 암퇘지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새끼 여섯 마리는 어린 나이를 감안하여 사형을 면제받았습니다. 1639년 프랑스 디종의 법정은 사람을 죽인 말에게 형벌을 내렸습니다. 살인 뿐 아니라 자연에게 저지른 범죄도 심판받았습니다. 1471년 스위스 북부 바젤에서는 괴상한 빛깔의 알을 낳은 암탉을 상대로 재판이 열렸습니다. 암탉은 악마와 내통했다는 판결을 받고 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여기서 나는 인간의 끝없는 잔인함과 무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유명한 재판은 1521년 프랑스에서 열렸습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파괴와 손실을 야기한 쥐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신고로 법원 출두 명령이 내려졌고, 국선 변호사까지 선임되었습니다. 두뇌 회전이 빠른 변호사 바르톨로메오 샤스네는 의뢰인들, 즉 자신이 변호를 맡은 쥐들이 첫 번재 공판에 나오지 않자 재판소까지 오는 길에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서 재판연기 신청을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피고들이 법정까지 오는 동안 원고 소속의 고양이들이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도록 보장해 줄 것을 법원에 호소했습니다. 불행히도 법원은 그런 보장을 할 수 없었기에 재판은 몇 번이나 더 연기되었습니다. 마침내 피고측 변호사의 열렬한 변호 끝에 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659년 이탈리아에서는 애벌레들에 의해 황폐해진 포도원의 소유주들이 법원에 서면으로 소환장을 제출했습니다. 에벌레가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기소 사실을 기재한 종이가 인근 나무들에 부착되었습니다.[….] 

 

-pp. 265-266,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먼저 '생태주의' 용어부터 살펴보자. 단어에서 대충 의미는 유추할 수 있지만 이런 기회에 정의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므로. 생태주의 사상은 여러 세부적인 갈래가 있는데 다음은 그중 심층 생태주의.

 

심층 생태주의는 환경위기의 원인으로 인간 중심의 자연 지배적 세계관을 지적한다. 이들은 서양 전통의 세계관에 내재된 인간 우월주의와 이원론적 분리주의에 반대하며 두 가지 규범을 내세웠다. 첫 번째는 생명적 관점에서 인간이나 자연적 존재가 평등하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이고, 두 번째는 나를 나 이외의 타인과 동식물종, 지구로 넓혀서 모두를 하나로 인식하는 경지의 자기 실현(self realization)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두셰이코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연쇄적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동물(혹은 짐승)을 의심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녀는 지방 경찰청에 민원을 넣는다. 발췌한 내용은 그녀의 두 번째 민원 내용 중 일부.

 

읽다가 재미있어서 껄껄 웃다가 이 내용이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창작인지 실화인지 궁금해 검색해보니 실화가 맞다.

'진실 혹은 거짓'에 등장할 것 같은 내용을 읽다 보니 드는 생각은 인간은 심심한 걸 못 견뎌하는 종족이라는 것과 동시에 참 유머러스한 종족이라는 것.

 

내용 중 개인적으로 가장 황당하고 엽기적이었던 건 악마와 내통했다고 누명을 쓰고 화형당한 암탉 얘기. 참고로 M은 쥐 얘기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오랜만에 전화 낭독을 함.

 

'화형당한 암탉'에 덧붙여,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우리와 다른 것'에 유독 경기를 일으키는 기질을 보인다.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부터 오랜 기간 서서히 고착된 집단주의의 영향인가 싶지만, '다른 것'을 확률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집단을 위협하는 징후로 보는 것이다. 한 예로 중세 유럽은 쌍둥이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의 역사를 갖고 있다.

 

동식물을 인간과 동일한 생명체로 인정해 공생하려는 마음은 가상하나 동일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기대하는 건 다른 영역인데 이건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다.

 

유시민 작가가 최근 <나의 한국현대사> 개정판을 내고 온라인 북토크를 몇 차례 했는데 그중 페미니스트 작가와 나눈 문답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묻는 내용인데 유 작가가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하니 '휴머니즘 주의'는 진영 내부에서 논란이 많은 주제 중 하나라는 거다. 이유는 인간중심주의이기 때문이라는데 그에 유 작가가 그렇게 보는 건 협소한 의미이고 자신이 말하는 휴머니즘은 보다 광의적인 의미라고 대답한다. 예로, 진영이 주장하는 다양한 표어에 '여성'대신 다른 무엇을 넣어도 성립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도, 두셰이코는 점성학에 심취했는데 일어나는 모든 사물의 변화를 별자리 영햑력으로 해석한다. 어차피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두셰이코는 제자인 디지오라도 설득하려고 열심히 점성술 얘기를 한다. 사실 이런 심리는 두셰이코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겐 원래 자기가 관심 있는 주제를 타인과 나누고 싶어하는 본성- 공감욕구가 있다. 하지만 선하고 인내심이 강한 제자도 스승의 끝이 없는 별자리 얘기에 결국 지친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베르길리우스가 말했죠. 점성가들에게 목을 끔찍하게 뒤트는 형벌이 내려졌다고요."

참다 못한 디지오가 나의 장황한 설명을 멈추기 위해 말했다.

 

-p.176,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만약 이 장면이 없었다면 나는 토카르추크가 점성술 광신도인가 오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펼쳐지는 기승전점성술에 직전까지 나는 작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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