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나를 물고 나는 풍경을 문다 > 설(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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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285 bytes / 조회: 957 / 2021.08.21 23:39
풍경은 나를 물고 나는 풍경을 문다


 

 나는 불타버린 고향 집 툇마루의 감각을 꿈속에서 되새긴다. 그집 툇마루 어느 부분엔가 아름다운 다갈색 단풍나무 나뭇결이 드러난 곳 부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거기 앉아 어린 나에게 벼락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곳에서는 우물 옆으로 크게 물결치듯 구부러져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 기둥이 정면으로 보인다.

"저기 소나무 위 하늘이었지. 우르릉 쾅 불기둥이 솟더니 크고 새빨간 불쏘시개 같은 번개가 쳤어……. 그러고는 잠시 후 불이 났단다. 이웃집 지붕에 벼락이 떨어진 거야.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아직 아침이었단다."

어머니는 여전히 소나무 위 하늘에서 불기둥을 목격한 순간의 표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표정에서 어렴풋한 무언가가 내게 전해졌다.

"네가 아직 배 속에 있을 때 집 근처에 불이났어. 그때도 말할 수 없이 놀랐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어머니의 표정에는 이상하게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어쩌면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그 공포의 심장박동을 빨아들인 것은 아닐까. 그것은 대지에 생존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간곡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나는 저 히로시마의 참상을 맞닥뜨린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이윽고 어머니가 되었을 때, 자식들에게 그때 일을 이야기할 표정이나 언어가 눈에 선하다.)

불타버린 우리 집 다다미방에는 초여름마다 상쾌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아이였던 나는 상쾌한 바람이 한층 더 즐거웠으리라.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도 미풍 속에서 상상에 잠기는 걸 좋아하셨던 것 같다. 시원한 등나무 방석에 앉아 소년인 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네가 크면 말이다, ……어디 보자, 네가 어른이 되면 말이야, 너는 아주 큰 집에 살 거다. 그리고 아주 훌륭한 아내를 만날 거야. 아무튼 넌 형제들 중에서 제일 행복해질 거다."

아버지는 자신의 예언에 열중한 나머지 내가 어른이 되어 어떤 옷을 입고 있을지, 내가 살 집 정원 풍경이 어떨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것은 미풍이 그려준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하나의 꿈을 내게 안겨주고 싶었을까(……중략).

 쥐 죽은 듯 조용한 좁다란 방이었다. 소년이던 내게는 그방 지붕 위로 무한히 펼쳐지는 세계가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그 시절부터 뭔가 이상한 것이 나를 매횩하며 나를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 ……너는 알고 있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나를 격렬하게 내 어린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무당벌레의 날개 무늬, 앵두의 광택, 비눗방울에 비친 무지개, 그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순식간에 먼 곳으로 날아가 서성거렸다. 나의 눈은 아름다운 색채에 정신이 팔려 머릿속까지 멍해져버렸다. 어린 시절 나는 오직 아름다움이라는 비밀에 쉽싸인 세상만이 못 견디게 좋았다.(그러니 내가 네 안에서 찾고자 한 가장 소중한 것은 어린 시절의 향수였는지도 모른다.

 

-pp.316-317, 『불의 아이』

 

풍경은 나를 물고 나는 풍경을 문다

서로 물고 물리는 두 개의 너와 나

 

-p.326, 『불의 아이』 

 

하라 다미키의 산문 두 편.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네 미래는 찬란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들은 이후 피폭자가 되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심연을 버티다 매일 오가던 철로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다.

 

/

 

원래는 리뷰에 있던 걸 따로 떼어냈다.

심상을 여러모로 건드리는 글...

 

해당 소설은 봄날의책이 출간한『슬픈 인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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