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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작가의 신간 에세이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시작하는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깔깔 웃다가 이 책을 사야겠다 했다.
그리고 그의 저작 리스트를 뽑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그리고 제일 처음 펼친『영화와 시』
책을 읽던 중에 종종 웃음이 터졌는데 웃음의 종류가 다양했다. 실소, 폭소, 냉소.
그중 폭소했던 대목. M에게 폰으로 읽어줬던 대목이기도 하다.
2003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브라운 버니>는 로저 이버트에게 "칸영화제 사상 최악의 영화"라는 평을 받았고(로저 이버트는 나중에 이 말을 정정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된 모든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영 중에 관객들은 감독을 죽여라!라고 소리쳤다. 빈센트 갈로는 로저 이버트에게 "뚱보 돼지야, 결장암에나 걸려라"라고 말했다. 로저 이버트는 "나는 언젠가 살이 빠질지 모르지만 당신은 영원히 <브라운 버니>의 감독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내 결장암 검사 내시경 동영상이 영화보다 재밌을 것이다"라고 대꾸했다.
-pp.40-41
듣고 있던 M이 평론가가 영화를 안 보고 평을 했군, 했다. 오, 천잰데. 내가 "브라운 버니를 봐야겠어"라고 하니 M이 왜냐고 묻는다. 아니, 이런 일화를 낳은 영화인데 당연 궁금하지!
어떤 예술이건 그것을 깊이 좋아하는 일이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게는 맞설 상대가 없고 - 있다면 가장 큰 상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이겨먹고 싶은 생각도 없다(경쟁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박 모 시인의 시나 박 모 감독의 영화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좋아할 수 없다. 내가 계몽주의적이거나 선민의식에 물들어 있는 건 아닐까. 더 많이 안다거나 더 좋아하는 건 무엇일까. 지적인 즐거움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깊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게 필요한 건 순수한 긍정과 기쁨이다.
- p.55
해당 대목을 읽어줄 때 M이 도중에 물었다. '박찬욱 감독?'
신기하기도 하지. 나도 '박 모 감독'에서 '박찬욱'을 떠올렸거든. 그리고 '박 모 시인'에서 떠올린 건 '박 준 시인'이고. 우스운 건, 박찬욱은 '혹시?'였지만 박 준은 거의 확신에 가깝게 떠올렸다는 거다.
'내게 필요한 건 순수한 긍정과 기쁨이다'라는 문장은 기시감을 느꼈는데 어느 작가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딱 이런 글쓰기를 하는 해외작가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