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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719 bytes / 조회: 266 / 2023.05.13 17:39
고전을 반복해서 읽는 이유


'고전은 반복해서 읽는다'는 사실 당연한 얘기다. 세월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관점이 달라지면 같은 책도 다르게 읽힐 수 밖에. 이번에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보면서 이 당연한 얘기를 다시 한번 실감했는데 어릴 땐 아무 생각 없이 줄거리를 쫓아가기에 바빴고 '오, 감각적!' 그저 감탄하고 말았던 대사가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짧은 대사에 함축된 은유와 복선이 다른 의미, 다른 느낌으로 와닿는다.

 

유니스 (마침내) 무슨 일이죠? 길을 잃었나요?

블랑시 (약간 신경질적으로)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유니스 여기가 거기예요.

블랑시 극락이라고요?

유니스 여기가 바로 극락이에요.

 

p.13

 

 

어릴 땐 무심코 흘려넘겼던 '극락'의 원어가 갑자기 궁금해서 블랑시의 해당 대사를 찾아봤다.

 

 

They told me to take a street-car named Desire, and then transfer to one called Cemeteries and ride six blocks and get off at—Elysian Fields.

 

-A Streetcar named Desire

 

'극락'에 해당하는 원어는 'Elysian Fiedls'다.

그럼 'Elysian Fiedls'는 뭘까. 다시 구글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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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랑시의 대사를 검색했을 뿐인데 챗봇이 등장했다. (구글이니 바드겠지)

아, 놀래라. 참고로 나는 아직까지 챗봇을 정식으로 이용한 적이 없다. 알파고에서 비롯된 AI봇을 향한 두려움이랄지 거리낌이랄지가 좀 있다. 이미 코앞까지 닥친 현실이라고 할지언정.

 

뭐어쨌든, 이로써 'Elysian Fields'가 뭔지는 알았고.

저 대사를 직역하면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가다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고 여섯 블록 지나 죽음의 땅에서 내려라'가 된다. 번역이 반역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의 땅'과 '극락'은 의미 차이가 너무 큰데...

혹시나 하여 역자 후기를 읽어봐도 해당 내용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정도면 린위탕의 '생활의 발견'급인데?

 

 

 

 

 

아무래도 우리에겐 생소한 (남의 나라)연대와 도시가 배경이니만큼 희곡에 쓰인 당시 뉴올리언스 분위기를 알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터. 다행히 우리에겐 훌륭한 시청각 자료가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접한 게 책인지 영화인지 모르겠는데 영화의 경우 흑백 화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거칠고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날 것의 질감에 어린 마음에도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반쯤 감은 기분으로 영화를 '견뎠던' 기억이 난다. 목줄을 푼 개처럼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에 남았던 배우가 말론 브란도라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쓰면서 방금 막 깨달은 건데 이래서 관람 등급이 필요한 거구나 라고...ㅎㅎ

 

케이트 블란쳇에게 8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블루 재스민>은 우디 앨런이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현대 배경으로 재해색한 영화다. 비비안 리/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와 달리 <블루 재스민>은 제목부터가 프로이트적이라고 할지, 재스민(블랑시)의 불안하고 우울한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 대공황 시기의 뉴올리언스와 21세기 샌프란시스코라는 배경 만큼이나 두 영화는 얼핏 다른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때 영화를 누리던 여성이 남편이 몰고온 파국으로 인하여 강제로 욕망을 거세당하고 몰락하는 과정이 주는 씁쓸한 뒷맛은 여전하다. 만약 내게 블랑시와 재스민 중 누구의 몰락이 더 비극적인가 묻는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블랑시'라고 답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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