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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189 bytes / 조회: 236 / 2023.06.13 17:41
인문학의 힘


*해당 도서를 읽고 쓴 것이긴 하지만 리뷰라기엔 죄다 사담이라 '설'에 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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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카뮈가 말하는 실존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는 있다.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삶에 대한 맹렬하고도 동물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챈다. 

 

-p.50

 

 

곽아람 『공부의 위로』는 읽는내내 과거- 구체적으로 '대학 생활'을 소환했다. 아마 나 말고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 같다. 와중에 놀랍다 한 건 그 기억이 몇 달 전 혹은 1년 전의 일처럼 생생해서였다. 

 

대학 시절 '학점의 여왕'이라고 불렸던(p.199) 저자와 달리 '선동열'이라고 불렸던 나는 말하자면 모범생의 전형인 저자와 대척점에 있었다. 별명까지는 아니지만 선동열 꼬리표를 뗀 건 2학년 2학기 부터였다. 

신나는 대학 생활이 세 학기 만에 끝난 건 2학년 2학기 부터 본격적인 전공 중심 커리큘럼이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유학이 예정되어 있어 전공 학점을 관리해야 했다. 집에선 내가 방학 때도 계절학기 듣는다고 두문불출하니 대견해했는데 실은 망한 세 학기 학점을 만회하느라 그랬던 거다. 난들 매학기 21학점 꾹꾹 채우고 더운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싶었겠는가. 또한편 출결 관리도 나몰라라 놀기 바쁜 와중에 K네 학교에서 여름 특강 청강을 했던 걸 보면 노는 와중에도 '학업'끄트머리는 늘 쥐고 있었던 것 같다. 

첫 세 학기를 원 없이 놀았다면 남은 다섯 학기는 원 없이 공부했는데 고시공부하는 선배들 틈에 껴서 거지꼴로 밤샘도 하고, 대기업 홍보실에 들락날락하면서 PPT도 짜고, 선배들 귀염 받으면서 조별과제도 하고 즐거웠다. 돌이켜보면 놀 때도 공부할 때도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었다.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었다.

(얼마전에 M한테 '너 스무살 때를 생각해봐라'는 얘기를 연거푸 들어서인지 요근래 때아닌 스무살 적 나를 성찰하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반박하니 M이 그 정도였다고 단언했다. 아닌데에???)

 

결국 내 대학 생활은 선동열 방어율을 위협하던 세 학기와 이종범 타율이 만만하던 다섯 학기로 정리할 수 있겠다. 덧붙이자면 나는 두산 베어스 응원한다! 이유는 프로야구 첫 직관 팀이 두산 베어스였기 때문이다. LG팬인 전남친과 LGvs두산 전을 직관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산 덕아웃 뒤쪽에 앉는 바람에 졸지에 (나만) 두산을 응원하면서 두산에 정착했다.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대학 때 내가 썼던 리포트와 과제물까지 챙기지는 않아서 지금 갖고 있는 그 시절의 유물이라곤 전공책 뿐이라 내가 들었던 모든 수업을 세세하게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억나는 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서양음악의 이해'에서 필립 카우프먼의 <프라하의 봄>을 감상했던 수업이다. 사실 이 수업을 기억하는 건 두 가지 때문인데 서양음악과 이 영화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종강까지도 의문을 풀지 못했던 것과, 수업을 함께 들었던 전남친이 <프라하의 봄>을 감상할 거라는 교수님의 예고에 '아 이 영화는 사비나가 끝내주지' 했던 말 때문이다. 내가 이 말을 이해한 건 시간이 더 지나 원작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쿨하고 멋진 사비나를 만나고서였다. 

철학 뭐였던 교양 수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리포트를 제출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제출 기한 전에 리포트를 낸 뒤에도 자꾸 떠오르는(하고 싶은) 말이 생겨나서 동기랑 선배 것까지 리포트 두 개를 대신 썼던 것도 기억나고. 나중에 니체 리포트 얘기를 듣고 '호구였구만' 비웃는 M에게 '(카톨릭)예비자 교리 과제로 냈던 신약 4복음 필사 기억나냐? 네 꺼 내가 썼거든?' 상기시켜줬다. 그렇다. 의무도 아니었던 신약 4복음 필사를 무려 두 번이나 쓴 것이다.......나 정말 호군가 봄;;;

 

돌이켜보니 그냥저냥 무임승차했던 것 같던 그 시절의 나 역시도 나름 맹렬하게 삶과 부딪치며 살았던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실존과 부조리가 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니는지 이해가 갈 것도 같고...

 

IT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AI 기반 각종 기술이 문명을 대변하는 용어가 된 21세기의 또다른 화두는 '인문학의 위기'였다. 저자는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p.324)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첨언하자면, 인문학의 힘은 결국 사고 확장에 필요한 인내를 유지하는데 동력을 공급하는 구동 장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많이 읽어라. 많이 읽으면 많이 생각하게 될 거고, 많이 생각하면 혼돈 속 질서가 보이고 나아가 우주가 보일 것이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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