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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8046 bytes / 조회: 124 / 2023.10.29 21:30
How to read


 

 

완독에 실패하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을 텐데 유시민 작가가 든 이유가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할 거다. 

그러니까 체력이 안 따라주거나, 취향이 아니거나.

여기서 '체력'이란 지구력, 달리 말하면 '뇌근육의 힘'을 의미한다고 나는 이해했다.

 

문제는 '취향'인데 이 '취향'이라는 게 참 요상하다. 책에 관한한 필력 위에 취향이기 때문.  

이를테면 유시민 작가가 3번 시도했으나 3번 모두 5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내겐 인생책 중 한 권이다. 그럼 유시민 작가와 나의 책 취향이 다른가. 그렇지도 않다. 유시민 작가와 같은 이유로 M.프루스트의 '잃.시.찾'은 국일출판사 판(당시 유일한 번역본)으로 첫 도전에 실패한 이래 여전히 손을 못 대고 있다. 이 책은 올재, 펭귄, 민음사 판이 책장에 꽂혀있다.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고, 고작 디저트 먹는 얘기를 왜 나노 단위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고'는 프루스트 뿐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도 마찬가지. 한마디로 의식흐름 기법은 내취향이 아닌 거다. 울프 여사의 전집이 예쁘던데 예쁜 전집에 환장하는 나한테는 그림의 떡이라는 얘기. 그러면 같은 의식흐름인데 프루스트 '잃시찾'은 왜 샀는가. 울프 여사의 책은 '올란도'를 완독하고 나가 떨어졌고, 프루스트는 '잃시찾' 1권 도중에 하차했고- 의 차이가 있다. 완먹과 찍먹의 차이랄까... 참고로 울프 여사의 '올란도'는 영화 원작이라 도 닦는 기분으로 완독했다.

 

물론 문맹이거나 문해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프루스트도 울프도 읽으려고 들자면 못 읽을 것도 없지만 취향인 재미있는 책들이 잔뜩 쌓여있는 판에 취향 아닌 책은 순서가 뒤로 계속 밀리는 것이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세상엔 재미있는 책이 너무너무 많다. 

 

영상에서 유시민 작가는 사건이 있고, 스토리가 있고, 맥락이 뚜렷한 책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내 기호와 딱 일치한다. 여기에 추가하자면 서사가 치밀하고 밀도있고 곡진한 얘기를 좋아한다. 문자도 무게를 가진다. 같은 플롯도 어떤 문장으로 쓰는가에 따라 팔랑팔랑 가볍거나 한없이 무겁다.

 

내 경우 독서 행태가 시기마다 변화를 겪었는데 10대 이전은 기호/취향 없이 책이기만 하면 읽었고, 10대는 읽는 재미 자체에 푹 빠졌고, 20대는 다독 욕심이 있었는데 이후 지금까지 온전히 선택과 집중이다. 아마 이 태도는 더는 책을 읽지 않는 날까지 이대로 쭉 갈 거다.

 

세상에 다양한 책이 있고 문맹이 아니면 얼마든지 활자를 누릴 수 있는데 단지 취향 때문에 편식을 한다 하면 얼마나 억울한가. 다행히 취향은 변하기도 한다. 내겐 프랑스 소설이 이에 해당하는데 '프랑스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종종 투덜댔지만 최근 그 생각이 바꼈다. 그렇다고 새삼 프랑스 소설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고 불호에서 호로 바뀌는 과도기인데 이런 변화는 전적으로 내 반골기질에서 비롯된다. 나는 싫은 걸 대할 때 아예 안 보거나 or 집요하게 파는 양극단 기질이 있는데 혹시 이 작가 혹은 이 소설에 나는 발견 못한 매력이 있는가 틈틈이 자꾸자꾸 들여다봤더니 어느새 프랑스 소설의 언어와 문법에 익숙해진 것이다. 처음엔 고수 냄새도 못 맡다가 이젠 쌀국수에서 고수를 빼지 않는 것처럼. 

 

익숙해진다는 건 내 마음에 작은 공간 하나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익숙해지는 것과 호감은 비례하기 마련이다. 연애편지를 쓴 시인이 아니라 연애편지를 배달하던 우편배달부와 아가씨가 사랑에 빠진 건 필연이었던 거지.

 

유툽의 부상과 출판 불황으로 제기되는, 영상이 문자텍스트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는 회의적인데 정보 습득을 예로 들자면 나는 아직까지는 영상보다 텍스트를 더 많이 활용한다. 얼핏 텍스트보다 직관적인 영상이 더 효율적이고 결과물도 더 좋을 것 같지만 경험에 의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영상은 대개 이미지와 소리로 구성되는데 감각 두 개를 동시에 열어야 하니 (내 경우) 능동이 아닌 수동 위치가 된다. 인풋과 아웃풋이 양방향이 아니라 선행 인풋 후행 아웃풋으로 순차 진행되니 오히려 정보습득과 처리 과정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어떤 미래를 가지고 올지 모르지만 현재로선 전자책과 종이책처럼 영상과 문자텍스트 역시 서로 대체제가 아니라 상호 보완재로 활용해야 한다는 거다. 


라디오는 소리로 상상 이미지를 경험하고, 영상은 소리와 실재 이미지를 체험한다. 그러면 문자 텍스트는 뭘까. 마케팅 용어를 빌리자면 라디오와 영상은 직관적인 감성 체험, 문자 텍스트는 이성에 의한 사고 과정을 거치는 인지 체험에 해당한다. 아직까지는 디지털 시스템이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 시스템의 영역인데 chatGPT의 한계가 떠오른다. 물론 현시점 얘기다.

 

대한민국 성인의 약 절반이 책을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다고 하는데 결론은 투쟁적으로 혁명적으로 열심히 책을 읽자는 얘기임.

 

가끔 '책을 읽으면 뭐가 좋나요' 라는 질문을 보는데 예전에 한 신인배우의 인터뷰를 보며 '아, 저 배우는 참 무식하구나' 했다. 세월이 흐르고 그 신인배우는 톱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톱스타가 된 배우의 인터뷰를 보며 이번에는 '와, 저 배우는 참 지적이구나' 감탄했다. 내 생각이 변한 게 아니라 그 배우의 지성이 변한 거다. 그 배우는 그동안 수많은 영화를 찍었고 그만큼 많은 대본-시나리오-희곡을 읽었을 거다. 소설 한 권을 읽는 건 한 사람의 세계를 엿보고 경험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삶을 타인의 시점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고민하는 동안 인식의 저변이 확장되고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야를 갖게 된다. 책은 '知의 양식'이다. 그러니 다양하게 읽고, 고민해라. 그러다 보면 훌쩍 자란 자신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덧_

내가 좋아하는 도서 리뷰어 중에 (아마 50대가 아닐까 싶은)아저씨가 있는데 리뷰를 정말정말 잘 쓰신다. 교과서라고 할지 정석이라고 할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이 아저씨 리뷰를 읽던 중에 박장대소했으니 바로 이 대목... '써고자 했다면 왜 써지 않았겠냐만은'

네, 이 분은 경상도 분이 맞습니다. 맞고요. 언어학에서 말하길 발음이 안 되면 쓰는 것도 안 된다고 하는데 알면서도 신기한 언어의 세계. 고등학교 때 수학쌤의 '양근 허건'이 생각나서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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