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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五車書)
- 다섯 수레의 책
9532 bytes / 조회: 1,142 / ????.08.31 13:25
8월의 책



박경리作『토지』를 읽고 있는 중이고『토지』를 끝내면 계속 이어서 올 연말까지는 국내 대하소설을 읽으려고 작정한 바 있어 당분간 소설은 구입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견물생심;;;
읽으려고 리스트에 담아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번 주문한 책들은 모두 제가끔 사연이 있는데 이를테면,
오정희 소설들은 마침 알라딘에서 출판사 브랜드전 할인 행사를 하길래
역시 알라딘에서 외국도서 할인 쿠폰 행사를 하길래 두 권을 담고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는 최근 심심해하는 것 같은 M군에게 보냈고
제수알도 부팔리노의『그날 밤의 거짓말』은 스포일러에 당할까봐 두려워 주문, 받자마자 읽었고
품절 -> 절판 과정의 절차를 밟고 있다는 김규항의『B급 좌파』는 주문한 지 거의 열흘 만에 받았지만,
사진엔 아직 없는 슈테판 츠바이크의『츠바이크 평전』은 아직 보름은 더 기다려야 받는다. 


*『그날 밤의 거짓말』은 부팔리노 제수알도의 소설로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스트레가상'을 받은 작품이다. 제수알도가 후보에 오르자 다른 후보자들이 모두 기권을 했다는 배경을 가진 이 소설은 얘기하기가 여러모로 난처한 소설이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가 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소설인가 싶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소설 같기도 하고...
한 마디로 '같기도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18세기 남·서 유럽에 유행했던 오페라나 문학 등에 어느 정도 눈과 귀가 밝은 사람이라면 소설 속에서 가볍게 지나가는 얘기들을 보다 색다르게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야기는 국왕 암살 음모를 꾸민 혐의를 받고 사형이 결정된 네 명의 사형수가 사형을 앞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보카치오의『데카메론』의 구성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읽고 나서 되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하룻밤이 남았다. 그 여덟 시간 동안 목숨을 구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헛된 영광을 쫓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아라. 협상 조건이 마음에 들거든 이렇게 하면 된다. 관례상 죄수들은 처형당하기 전날 밤 감방을 나와 아래층에 있는 위안실에서 족쇄 없이 지낸다. 그곳에는 벌써 신부 한 명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있다 그 곳에 가면 내일 축제에 초대된 다섯 번째 손님과 너희 모두를 위한 편안한 침대,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네 개의 백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들 편할 대로, 하지만 가능한 천천히 해주길 바라는데, 그 백지 위에 각자 다른 죄수들 모르게 거부를 뜻하는 가새표를 하든가, 아니면 내가 너희들에게 물은 이름을 적어 넣으면 된다. 표시를 한 다음 종이를 작은 상자 속에 넣는 거다. 내일 아침 내가 돌아와서 확인했을 때, 가새표가 그려진 종이가 네 개라면 너희들은 죽게 된다. 반대로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개라도 이름이 적혀 있다면, 네 사람 모두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누가 배신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 pp.39-40 


**『기형도전집』에는 그의 유작시집인『입 속의 검은 잎』외에도 미발표 詩 스무 편, 단편소설 여덟 편 그리고 산문이 있다. 수록된 단편소설중 특히「영하의 바람」은 작가의 유년이 겹쳐져서 읽고 나서 많이 우울했다.
대학 동기중 단짝이었던 K군이 기형도를 특히 좋아했다. K군은 자신의 프로파일에「빈 집」을 2년 넘게 걸어두기도 했다. 졸업 후 오랜만에 K군과 연락이 닿아서 밤 새워 전화통화를 한 날이 있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나무야, 날 샜다" 라며 웃던 K군은 고2 때부터 짝사랑했던 그녀와 결국 햇수로 7년 만에 완전히 정리했다고, 상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형도의 유작시집에서「빈 집」이 제일 유명하지만, (물론 나도 이 시를 좋아하지만)나는「植木祭」를 좀 더 좋아했다.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生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짓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봄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파라다이스 키스 Paradise Kiss』는『나나 NANA』로 유명한 아이 야자와의 만화다. 야자와의 작품은 섬세하고 예쁜 그림체 말고도 소설을 읽는 듯한 감성이 느껴져서 참 좋은데『파라다이스 키스』에서도 그러한 장점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어쩌면 전형적인 현대 일본소설의 문체요 감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소설에 비하면 만화는 거부감이 거의 없고 그저 재미있다.

죠지의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끈질기게 울리다가 지친 듯 끊어졌다. 난생 처음 해 본 키스는 강렬한 코롱과 함께 마약같은 맛이 났다. 난 향수같은 걸 뿌리는 남자는 밥맛이었지만 이 냄새만은 죽을 만큼 좋아. [1편]

"뒤에 붙어 있는 증명사진을 보고 첫눈에 반했어.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안을 열어 봤지. 교문 앞에서 널 보고 확신했어. '나의 뮤즈를 찾았다'고. 나도 너랑 있으면 이성을 잃어. 인간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어. 서로의 욕구를 밀어붙일 뿐이지. 그래서 우린 안 돼."
"알면 고쳐. 나도 어떻게 할 테니까…. 고치자, 우리…."
죠지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린 원하는 게 너무 달라. [5편] 


엔딩을 두고 작가를 원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비교적 만족한 편. 이제 불과 스무 살 전후의 그들에겐 미래는 모험, 도전, 가능성 그 모든 것일텐데 사랑도 미래도 바로 지금 결정 지으라고 다그치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설혹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이 자신이 꿈꾸었던 것과 다른 장소에서 과거의 연인이 아닌 새로운 사랑과 함께 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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