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쾨슬러 <한낮의 어둠>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앤드류 솔로몬의 심리에세이 <한낮의 우울>과 제목이 비슷하여 같은 계열인가 했으나, <한낮의 어둠>은 저널리스트가 쓴 소설.
작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는 자살 노트에 (요약하면)'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음의 과정이 모욕적이라서' 라고 남겼다. 그가 남긴 글은 역설적으로 죽음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절망이 느껴진다. 이렇게 쓰니 이 소설의 정체성이 '우울한 심리를 위한 개론'쯤으로 향하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다. '동물농장', '수용소군도'와 비교되느니 만큼 <한낮의 어둠>은 혁명과 권력 앞에 선 인간을 다룬다.
문학적으로 지루한 독서가 예상되는 소설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이유로 언제 절판될지 몰라서 미리 내 책장에 꽂아두려고 주문한 소설.
신형철 작가가 신간에서 '최근 몇 년 간 읽은 책 중 최고의 논픽션'이라고 이 책을 소개한 걸 보고 아묻따 주문했다.
슬픔의 사례를 통해 심리 치료의 해답을 모색해보는 에세이.
내가 나이를 먹어가고 있구나 실감할 때가 있는데 주변에 위안이 필요한 사람이 하나둘 늘어가는 걸 볼 때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양가 감정의 표현 방식이 '웃음'과 '눈물'인데, 왜 눈물은 카타르시스이고 웃음은 아닌가, 얼마 전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휘발성인 웃음은 발산만 가능하지만 슬픔은 발산과 수렴이 모두 가능한 감정이다. 비극을 통해서만이 내면의 정화(=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어찌보면 인간으로선 형벌인가 싶기도 하고...
'위로에 관하여'...
예전에 새벽에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잠깐 <여고괴담>(몇 편인지는 모르겠다)에 채널을 멈췄는데 무서우라고 무섭게 연출한 장면에서 무서움을 못참고 엉엉 울었다. 근데 울다 보니 언제 왔는지 묘령이가 내 앞에 앉아서 가만히 나를 보고 있는 거다. 그리고 묘령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 얘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구나,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위로받았다. 놀랍게도. 정말로. 아마 묘령이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슬픔을 구분하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우는 걸 보고 이유가 뭐든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때 내가 배운 건,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는 거였다. 왜 슬픈지 왜 우는지 따지는 건 나중의 일이다.
인간이 사는 동안 느끼는 가장 큰 슬픔은 아마 육친을 잃은 상실감일 거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던 롤랑 바르트는 애도에 대해 말하는 건 너무 분석적이니 슬플 땐 그저 슬퍼하게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실제가 어떻든 나는 그 문장에서 저자의 흐느낌을 느꼈다. 제발 나 좀 내버려두시오, 좀머 씨의 외침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므로 슬픔에 빠진 누군가를 감히 말로써 위로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외롭지 않게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혼자가 아님을, 옆에 아직도 누군가 남아 있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척 놀랜드는 왜 배구공에 눈코입을 그려놓고 '윌슨'이라고 이름 붙여주었겠으며,
다니엘 디포는 왜 로빈슨 크루소에게 프라이데이를 보내주었으며,
신은 왜 아담에게 하와를 보내주었겠는가.
잊지말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