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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754 bytes / 조회: 375 / 2024.05.17 07:52
[도서] 느린 호흡으로 읽은 책 『새벽과 음악』『건너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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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음악ㅣ이제니


 

내가 한국에서 왔고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체첵은 자신의 이름이 한국말로 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목 뒷덜미를 가리키며 무언가 보여주려고 멀리 침대 발치로 가 섰는데, 목을 쉽게 가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가리키는 그것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체첵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그리고. 그런 뒤. 휴대폰 화면에 찍힌 체첵의 목덜미를 보았을 때.

 

꽃.

 

그 목덜미 한가운데에는 '꽃'이라는 한글 하나가 문신으로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꽃. 나는 그토록 슬프고 아름답고 강렬한. 그 어떤 단어를.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p.17

 

* 체첵(몽골어) - 꽃, 꽃을 피우는 식물, 화초, 화훼, 관상식물.

 

 

엘라 피츠제럴드. 희뿌연 새벽. 겨울 장마 긴 빗소리.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떠올린 키워드s.

어떻게 읽어도 시인의 글이다. 시인의 텍스트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 걸까. 

텍스트 감성이 예민한 독자라면 이제니의 글이 파도의 포말처럼 발끝과 손끝을 적시는 기분을 느낄 것 같다. 포말이 마른 후 들러붙는 염분은 덤이다.

나는 예민한 독자는 아니어서 무대를 보는 관객의 기분으로 시인의 음울한 문장을 훑었다. 이참에 깨달은 건데 무대가 격렬해지면 나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 같다.

 

그저 일상에서 길어올렸다고 하기엔 시인의 감성과 지나치게 밀착적인 이제니의 글은 에세이보단 일기에 가깝다. 그리하여 타인의 일기를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의문 하나가 따라붙는다.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이 시인으로만 기능한다면, 그리하여 매순간 스스로를 향하는 예민하고 외롭고 치열한 관찰자의 시선을 떨칠 수 없다면, 그건 일종의 시인의 숙명인가, 라는.

물론 모든 시인이 예민하고 치열한 시어를 쓰지는 않는다. 시인의 절반은 다정하고 포용적인 시어를 쓴다.

 

기억은 대개 장소와 추억을 공유한다. 때로 장소는 음악이 되기도 하고, 향기가 되기도 하고. 작가는 그중 추억을 부르는 매개로 음악을 선택한다. 한때 유행했던 노래, 그 노래를 듣던 공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 음악은 지나간 시간을 소환하고 그렇게 시인은 나이가 들어간다.

 

긴 겨울 밤 새벽에 빗소리를 들으며 이 책을 읽으면 아마도 시인의 감성과 최고의 합일을 이룰 것 같지만, 같은 이유로 뜨거운 여름 환한 대낮에 생활의 소음에 둘러쌓여 읽기를 권함. 시인의 감성을 즐기고 누려야지 그것에 휘둘려서야 곤란한 일이므로. 물론 본인이 공감과 이해의 저울추를 능숙하게 다루는 관조자라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읽든 상관없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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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오다ㅣ김현우

 

 

변하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무언가는 위로를 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화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아쉬워한다. '길들여진 상태'가 편안한 만큼 의지와 달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은 서운하고, 때론 아프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서 아프고, 흰머리가 늘어서 서운하고, 내일 해야 할 새로운 일은 어쩔 수 없이 두렵다. 코타키나발루의 숲속 도로에서 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두려웠던 것도 나는 아직 그것들에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로 위의 하늘에는 쏟아질 듯한 별이 있었다. 변하지 않고 늘 자리를 지키고 있어 든든한 친구 같은 별들이 주는 위로. '괜찮아. 네가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던, 앞으로 또 얼마나 변화를 겪든, 우리는 이대로 여기 있을 거야'라고, 정말 '보라는듯이' 말하는 별들의 위로.

pp.135-136

 

 

곰곰 생각해보니, 사는 동안 부딪치거나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를 대하는 태도로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익숙하지 않아서)'라는 말만큼 위안이 되는 말이 있을까 싶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표현이 한때 유행했던 것도 그런 맥락인가 싶고. 아직 겪어 보지 않은 미답의 영역이므로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데도 대다수 우리는 초행길도 능숙하게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삶의 지침일지도 모르겠다.

 

호주 대륙의 남쪽, 호주와 남극 사이에 있는 테즈메이니아로 날아가 오리너구리를 찍는 촬영기를(pp.56-61) 읽던 도중에 M에게 전화로 떠들었다. 

 

 

혹시 오리너구리라고 알아?

오리너구리는 조류와 포유류 중간 단계에 있는 종이래

처음 오리너구리 박제를 본 사람들이 두 동물의 앞 뒤를 이어붙인 사기라고 했대

아주아주 예민해서 모습을 보기가 어렵대

그래서 작가가 예민보스 오리너구리를 촬영하려고 생고생을......

깔깔깔

 

 

월급쟁이 직장인의 애환이 담긴 분투기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나 뒤늦게 저자에게 살짝 미안했다.

 

'존 버거 역자'라는 사전 정보로 인해 미리부터 호감과 내적친밀감을 두르고 읽은 김현우 PD의 글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좋았다.

 

직전에 읽었던 허연의 책에 등장하는 '큰 이야기를 끌어댔지만 결국은 작아져 버리는 소설이 있고, 작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읽고 나면 큰 성채같은 소설이 있다'(p.156,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는 글귀를 빌자면 김현우의 산문은 소재는 작지만 주제는 큰 이야기에 해당한다. 피식 웃음이 샜다가 다음 순간 진지해지고, 무거운가 싶으면 다음 순간 몽글몽글해진다. 문장 행간마다 사색하는 사람 특유의 진지하고 성실한 시선이 묻어나는 것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올해 발견한 저자.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 중 정여울의 신간 두 권과 함께 김현우 피디의 책도 주문.

이제니의 산문은 살 지 말 지 좀 더 고민해야봐겠다. 타인의 예민한 자아와 긴 시간 마주 보는 건 아무래도 기력이 필요한 일이라... 그걸 감안하고도 한 번씩 생각날 것 같은 대목이 아쉽기도 하고... 어쨌든 이제니의 산문을 두 번 읽을 결심에는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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