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Alice's Casket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0168 bytes / 조회: 315 / 2024.05.20 10:01
[도서]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20240523091530_b3faaf9ce6fb4fb297beb87e0979a68c_fqpe.jpg

20240523091529_b3faaf9ce6fb4fb297beb87e0979a68c_49au.jpg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ㅣ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ㅣ허연

 


제목을 봐라.

시인은 어쩌면 이리도 시인 같은지...

 


20240523080447_7c18db85889185e6310a10abc88b6152_hciy.jpg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북다트를 사용한다.

어쩌다 보니 책에 북다트가 잔뜩 꽂혔는데 생각해보니 이게 좀 웃기다. 제목만 봐도 연작인 두 책은 비평이라기엔 작가의 연대와 작품을 가볍게 훑는 데 그치고, 리뷰라기엔 인포북 기능이 강해서 태그를 붙이자면 '작가인명사전' 정도가 적당한데, 저자가 자기 취향대로 뽑은 책 속 책에 밑줄을 긋는 게 마치 내 간식을 남의 수저로 퍼먹는 듯한 현타가 오는 거다. 여하튼 그를 의식해서지 두 번째 책은 북다트가 훨씬 적은데 이건 이것대로 웃기다.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내 무의식은 어쩜 이리 의식적인지.

 

 

 

 

20240523080445_7c18db85889185e6310a10abc88b6152_xt9r.jpg


20240523080446_7c18db85889185e6310a10abc88b6152_iyi1.jpg

 

 

북다트를 꽂은 페이지를 작가 인명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조지 오웰 <1984>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박이문

줄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역사>

비트겐슈타인 <논리 철학 논고>

마티유 리카르

에라스뮈스

드니 드디로 <백과전서>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W.G.제발트 <토성의 고리>

크리스토퍼 메릴 

이븐 시나

모옌 <홍까오량 가족>

 

 

작가의 목차 중 인물을 꼽자면 이븐 시나와 제발트. 

 

나처럼 '이븐 시나'가 생소한 사람도 있을 텐데 허준과 '동의보감'을 떠올리면 되겠다. 유럽의 근현대의학이 이슬람계 이븐 시나의 '의학 정전'을 교과서로 삼고 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인데(사실 관심도 없었다) 이븐 시나가 의학적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이 인상적이다. 성직자가 성경을 독점했던 기독교와 달리 어릴 때부터 의무적으로 읽고 쓰기를 교육하는 풍토에서 자란 이븐 시나가 그리스 철학과 코란을 조화시킨 사상으로 중세 유럽 철학의 설계도를 열었다는 것이다.(p.172) 

스콜라 학파의 전범을 제시한 이븐 시나는 <치유의 서>에서 '육체는 여행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떠나보내야 하는 짐승이다'(p.173)는 문장을 남겼다고 하니 세상은 넓고 역사는 유구하고 내가 모르는 천재는 참으로 많구나 감탄한다.

 

제발트를 꼽은 이유는 그의 문학적 배경과 글쓰기의 연원 혹은 기원의 단서를 뜻하지 않게 이 책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허연의 감상처럼 제발트가 폐허가 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도시 안의 폐허에 감응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타인의 감상에서 내가 놓쳤던 걸 발견하는 순간은 숏폼의 도파민보다 중독적이다.

 

그리고 SF소설 <정신 기생체>를 쓴 콜린 윌슨의 문예비평서 <아웃사이더>에 관하여. 그동안 내가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내처 해당 책을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는 메모를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조지 오웰은 내가 읽은 오웰도, 남이 읽은 오웰도 여전히 '조지 오웰'임을 확인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20세기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 <1984>가 출간된 지 반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의미있게 읽히고 있다면 빅브라더는 더이상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처음은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헤게모니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탄생시킨 빅브라더는 더는 상상 속 망령이 아니다.

 

백석의 시에서 '나타샤'가 '순이나 분이였다면'이라는 허연의 가정도 재미있다. 허연의 말처럼 나타샤가 아니었다면 백석의 시는 결코 우리가 아는 그 분위기가 아니었을 거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대중에겐 '박인희'로 더 익숙한 박이문 선생의 에피소드는 책을 좋아하는 장서가라면 누구나 공감했을 것 같다. 장서가로서 선생의 책꾸러미에 감정이입되어 연민과 함께 서늘한 뒷맛이 남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역시 내가 읽고 고민하는 것 보다 남이 읽고 고민한 것을 읽는 게 훨씬 재미있고 유익하다. 허연의 비트겐슈타인 인용을 재인용하건대, '철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병에 갇힌 파리에게 병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철학이 할 일이다.'(『철학 논리 논고』) 

<논리 철학 논고>를 읽기 위해 해설서만 대여섯 권은 읽었을 거라는 저자의 불평은 팩폭 아닌가 싶고. 첨언하자면 <논리 철학 논고>를 쓸 정도는 되어야 유럽 최고 부자의 지위를 버리고 시골 평범한 서민을 자처할 수 있는 것인가, 그저 경이롭다.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고 불행으로 끝난 에라스뮈스의 지성에 대하여 더 알고 싶다면 스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을 권하고.

 

프랑스 혁명의 방아쇠가 되었다는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1728년에 긴 여정의 첫 삽을 뜨고 결국 50여년 만인 1772년에 28권 분량으로 작업을 마무리한다. 긴 세월이 걸렸지만 다행히 디드로는 자신이 시작한 작업의 결실을 지켜보았으니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이 과정을 보면 뭔가 뭉클한데 금서로 지정되고, 출판 허가가 취소되고, 배포와 인쇄가 금지되고, 무엇보다 동료들이 떠나고 혼자 남아 끝내 완간이 된 게 28년 만이라고 하니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고 끝내 결과에 이르게 한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싶은 거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북마크 중 하나를 인용하자면 이것.

 

"현대인들은 자기가 자기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 것 같아요."

(p.175, '철학자 아버지와 티베트 승려 아들의 대화', 마티유 리카르)


 

20240523080444_7c18db85889185e6310a10abc88b6152_0ta8.jpg

 

 

연작이라 비교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굳이 한 권을 고르자면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가 조금 더 괜찮았다. 편집이 바뀐 것 외에는 내용 구성이나 형식은 똑같은데 그럼에도 두 번째 책이 좀 더 정돈된 느낌이 있다.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49건 1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349 도서  [비밀글]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어느 작가의 오후』 24.08.27
348 도서 일상에 스며든 불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24.08.26
347 도서 몽상가들의 페이지 『사랑의 책』 24.07.17
346 도서 공포와 매혹 『난 지금 잠에서 깼다』 24.07.10
345 도서 그날 밤이 불러온 온 과거의 역습 『한밤의 도박』 24.07.03
344 도서 에꼴 드 경성 『살롱 드 경성』 24.06.11
343 도서 의미와 무의미의 소묘 『보통 이하의 것들』 24.06.04
342 도서 상실과 결핍의 변증 『원도』 (스포) 24.06.02
도서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24.05.20
340 도서 느린 호흡으로 읽은 책 『새벽과 음악』『건너오다』 24.05.17
339 도서 팬들에게 보내는 '안녕' 『숲속의 늙은 아이들』 24.04.21
338 영상 너의 기쁨이 나의 행복이 아닌 비극 <페어플레이>(2023) 24.03.10
337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24.03.06
336 도서 『갈대 속의 영원』 24.02.14
335 도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 24.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