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 오현종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232 bytes / 조회: 2,920 / ????.06.24 23:38
[도서]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 오현종


더스틴 호프먼의 영화『졸업』을 봤을 때, 나는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와 버스에 올라탄 그들 연인의 뒷 얘기가 몹시 궁금했다. 마찬가지로 SBS드라마『 불꽃』에서 이영애와 이경영(드라마속 이름을 잊어버림)이 각자 자동차를 몰고 와서 해후한 뒤의 얘기 역시 진심으로 궁금했다. 순전히 '그들은 과연 그 후 행복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은데...'라는 이유에서.
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그녀가 모르는 그녀에 관한 소문(Rumor has it)』은『졸업』의 후일담'격'에 해당하는 스토리다. 후일담'격'이라고 한 것은 여자 주인공이 영화『졸업』의 원작이 자기 부모의 얘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믿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하기 때문. 영화가 '후일담'이 가지는 매력과 장점을 제대로 못 살렸으므로 영화 얘기는 이쯤에서 관두고.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 문학동네
73년생 (여성)작가는 1999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학동네의 소설 판형을 좋아하는데 이번『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종이질도 안 좋고 책 자체가 전반적으로 성의가 없어 보인다. 거기다 작가의 이력과 출판사를 확인하기 전까지 로맨스소설로 착각했던 것이 하나도 안 이상했을만큼 제목도 표지도 다분히 '장르문학적'인 이 소설의 내용을 스무자평으로 간단하게 설명하면 007인 본드와 '한 때' 그의 걸이었던 미미양의 후일담이다.

* '007 제임스 본드'를 나는 영화보다 책에서 먼저 만났는데 워낙 읽은지 오래돼서 책의 제목도 내용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런던,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s) 상점, 양복점내에 숨겨져 있던 비밀 문, 007, 스파이...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본드걸의 이름은 미미. (성은 끝내 안 나온다. 아니면 혹시 양?)
그럼 007은? 당근 제임스 본드다.
007의 무수한 본드걸중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해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 미미양. 미미는 테스트를 통과하고 신입연수도 무사히 마친 뒤 013을 부여받는다. 왠지 재수없을 것 같은 번호 '13'은 다들 거부해서 남아 있던 번호.
그럼 미미양의 007은 어떨까.
우선 007은 만둣국, 청국장, 라면, 감자탕을 먹는다. 그리고 TV로 축구와 코메디 시청하는 것을 좋아하고, 섹스를 할 때 애무하는 걸 귀찮아 한다. 잘 때는 코도 골고 입가에 침도 묻힌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만 한국적인, 게다가 요즘 트렌드인가 싶게 공공연히 등장하는 남성형인 찌질한 007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암호같은 구절을 종종 발견한다. 몇 가지만 얘기해보면 미미양이 스파이 테스트를 받기 위해 찾아간 술집의 주인 이름은 강내휘인데 미미양이 술집에서 공짜로 계속 주워먹었던 것이 강냉이이다. 미미양은 1.5리터 사이다를 한 번에 마시는데 미미양이 첫번째 임무에서 부여받은 가명은 '오란실'이다. -> 나는 오란C를 연상했는데 오버인가? 어쨌든 이런 식의 언어 유희가 소설 여기저기에 심심찮게 포석처럼 깔려있다. 미미양이 스파이가 되려고 열심히 탐독하는 저서들의 제목들도 마찬가지.『 스파이는 페루에 가서 죽다』,『 너희가 스파이를 믿느냐』,『 암호 읽어주는 여자』,『 간첩이 있던 자리』,『 스파이와의 인터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전』... 참고로 나는 이러한 제목들을 작가의 농담으로 그냥 유쾌하게 읽었다. 사실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로 작가가 이 소설을 가볍게 썼으리라 짐작되는 혐의가 있긴 하다.

나는 작가 후기나 소설의 말미에 있는(이를 테면 서평에 해당하는) 해설 읽기를 좋아하는데 말하자면 본 메뉴를 잘 먹고 나서 후식을 먹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재미있게 읽고 난 이 소설의 해설은 좀...
해설의 제목은 '남근이여 안녕'인데 요즘 출판되는 본격문학(=순문학)의 경향을 '남근(남성성)의 붕괴', '아버지의 부재', '가부장주의 해체'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행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재미있는 소설'로 이해해야 하지 않나 싶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본격소설도 장르소설도 아닌 그러나 굳이 장르속으로 밀어넣자면 로맨스판타지액션어드벤처쯤 되겠다. 임무를 마친 007의 품에 안겨 오렌지색 열기구를 타는(P.8) 시작이 그러하고 내부 스파이를 잡기 위해 성냥팔이 처녀로 위장하고 성냥갑 모서리에 성냥을 그으면서 주문을 외는(p.205) 소설의 말미가 그러하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은 해당 작품의 세계를 이해하는 개인적인 한 방편일 뿐 다른 의도는 없음.
'텍스트 해석'이라는 아주 친절하게 잘 정리된 논거가 있음에도 원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과잉해석은 늘 넘쳐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안노 히데야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다음은 영어 55단어로 쓰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중 하나다.

<침실에서>

"조심해. 그 총 장전되어 있어." 그는 침실로 다시 들어서면서 말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 총으로 부인을?"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청부업자를 고용해야지."
"나는 어때요?"
그는 씩 웃었다. "순진하긴. 어떤 바보가 여자를 고용하겠나?"
그녀는 총구를 겨누며 입술을 적셨다.
"당신 부인."  

이 짧은 소설을 읽고 현대 가족사회의 붕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부부의 소통의 단절, 총기소유 허가가 낳은 비극, 남근의 아이러니... 등등을 떠올려야 한다면 즐거워야 할 독서가 얼마나 피곤해지겠는가.

결론은『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재미있는 소설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그냥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007이 몰고 온 자동차는 속도를 높일 때 소음이 심하게 들리는 낡은 차였어요. 범퍼가 긁혀서 볼썽사나웠지요.
"은색 스포츠카는 어쨌어요?"
"그거 원래 내 차 아냐. 그건 여자랑 휴가 갈 때나 몰고 가는 거지. 나 돈 없어."
"인생이 줄기차게 거짓이군요. 봉급이랑 위험수당은 다 어쩌고요?"
"일찍 은퇴하고 싶어서 주식에 투자했다 날렸어. 몰빵한 회사가 상폐됐거든."
"분산투자란 기본 중의 기본도 모르나요?"
"아무래도 모험심이 지나쳐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은퇴라뇨? M의 뒤를 이을 후계자라고 모두들 말하던데."
"후계자? 그런 데는 관심 없어."
"누구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죠."
"난 M처럼 냉철하지가 못해."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만도 않던걸요. 여자를 잘라버리는 일엔 피도 눈물도 없잖아요."
007과 나는 감자탕집에 마주 앉아 뼈다귀해장국을 시켰어요.

- pp. 127-128 

*참고로,
몰빵 - 집중투자, 상폐 - 상장폐지
이 소설에는 이런 식의 줄인 단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164건 10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29 도서 박완서 / 친절한 복희씨 ??.10.29
28 도서 진산 민해연 / 가스라기 8 ??.10.06
27 도서 백문임, 송태욱 外『르네상스인 김승옥』 ??.08.12
26 도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 2 ??.07.22
25 도서 김애란『달려라, 아비』 4 ??.07.18
24 도서 김경 /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2 ??.07.18
23 도서 오드리 니페거『시간 여행자의 아내』 2 ??.07.17
22 도서 변신 이야기 2 / 이윤기 옮김 ??.07.06
21 도서 변신 이야기 1 / 이윤기 옮김 4 ??.07.01
도서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 오현종 6 ??.06.24
19 도서 착한 사랑『사랑스런 별장지기』, 이도우 5 ??.06.15
18 도서 김수현『겨울로 가는 마차』 7 ??.05.19
17 도서 은희경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1 ??.05.07
16 도서 서머싯 몸『인생의 베일』 2 ??.04.22
15 도서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 ??.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