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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7773 bytes / 조회: 4,998 / ????.07.22 18:58
[도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주제가 보편적인 사회 윤리 안에 머물지 않을 뿐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기까지 할 때, 독자는 독서를 시작함과 동시에 작가와 공범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일찌감치 자신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설치해놓은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권택영 역 / 민음사

 

로 시작하는 나보코프의 소설『롤리타』는 굳이 그 내용의 외설성 때문에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설명이 없어도 지금은 그 의미가 명백히 상징적인 명사가 되어버린 '롤리타'라는 제목만으로도 그 논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소설.
그런데 이 소설은 막상 그다지 외설스럽지 않다. 변태적인 호기심으로 책을 펼친 사람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외설은커녕 여타 기괴하거나 파격적이거나 엽기적인 일부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 문체나 문장이 더 없이 아름답고 목가적이다. 게다가 때로는 재미있는 상황극을 보는 것처럼 웃기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유머 가득한 그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서른 일곱살의 지적이고 잘 생기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학자이자 교수인 험버트는 법적으로 부녀관계에 있는 이제 겨우 열두 살난 돌로레스(이하, 로)와 뻔뻔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즉 님펫에 집착하는 소아성애자 즉 변태성욕자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망설였든, 그의 말대로 로가 먼저 그를 유혹했든, 로가 얼마나 당돌하고 막무가내이며 제멋대로이고 되바라진 여자애였든지 간에 그중 어느 것도 로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막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화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그 주인공이 범죄자이거나 악인일 때 간혹 심정적으로 화자에게 동화되고, 더 나아가 화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는 독자를 양산한다. 하지만 독자는 나쁜 주인공과 좋은 주인공을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소설속 휴머니즘을 지탱하는 관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누가 주인공인지가 아니라 주인공의 절대 의지가 선한가 악한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독자는 좀 더 이성적인 독서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하필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애를 느끼는 심리적, 육체적으로 성적소수자인 험버트를 동정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험버트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험버트는 어린 로를 사랑하고 그녀가 떠났을 때는 절절하기 그지 없는 내밀한 고백으로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로는 그런 험버트의 사랑을 오히려 이용하고 배신한다. 이런 과정에서 로가 사뭇 어린 팜므파탈로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은 로는 강하고 현명한 아이일 뿐이다. 로는 험버트와 나이가 같을 뿐 아니라 험버트에 비하면 형편없는 외모에 형편없는 인간인 퀼티(=클레어 큐)는 그녀의 마음을 망쳤지만 험버트는 그녀의 인생을 망쳤다는 걸 구분할만큼 충분히 현명하고, 열 일곱의 나이에 임산부가 되지만 돌아오라는 험버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귀가 잘 안 들리는 노동자 남편과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강한 아이이다.

가끔 어떤 소설은 읽고난 후 작가가 소설속에 심어 놓은 기호를 제대로 짚은 것인지, 혹시 과잉해석은 아닌지, 작가에게 속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낮은 이해력이 작가의 의도를 놓친 것은 아닌지등등... 독자를 작아지게 만든다. 어쨌든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재미있지만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희극적인 그러나 결국은 서정적인 소설이다. 고전은 읽는 과정에서 느끼는 재미뿐 아니라 읽고 난 뒤의 지적 충만감에서도 그 만족도가 확실히 다르다. 아마도 이것이 고전의 힘인 듯.

* 사족.
소설 외적인 이유로 이『롤리타』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것은 그토록 오독(誤讀)을 싫어한다고 소리를 높이던 장정일이 정작 그의 독서일기에 가장 자주 등장했을 이 소설『롤리타』에 대해서는 중대한 오독을 범하고 있어서였다.
그럼 장정일이 읽은 것과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책인가? 그렇지 않다. 장정일과 나는 똑같이 민음사의 권택영 번역본을 읽었다. 장정일이 틀렸다는 것은 명백하다. 일단 험버트의 님펫 집착증은 정신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다분히 육체적인 관계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한다. 험버트는 파리에 있을 때 님펫의 조건에 근접한 매춘부를(아마 열 여섯쯤 되었을 나이의) 돈으로 사서 육체적인 관계를 즐긴 전력이 있고, 로를 호텔로 유인해서 강력한 수면제를 먹이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도 그의 목적은 더 없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로가 잠들었을 때 험버트는 호텔 로비를 전전하면서 '마지막 선을 넘을 것인가'로 갈등하고 고민한 것이다.
장정일은『독서일기 5』에서 험버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지양하는 '그저 소아애(小兒愛)'일 뿐이라고 단정 짓고 험버트가 로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여름 캠프에서 로가 동급생 남자애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나서라고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장정일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첫 관계에서 눈먼 정욕으로 세 번이나 아이를 범한, 험버트가 자신이 로의 첫번째 애인이 아니라는 얘기를 로에게 듣는 것은 관계가 끝난 뒤였다.(pp.183-188,『롤리타』)
애석하게도 장정일의 믿음과 달리 험버트의 성적 욕구는 '피부 접촉이나 포옹을 통해 정서적, 신체적 만족을 얻는' 수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험버트를 그저 '소아애'가 아니라 '소아성욕자'라고 불러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장정일이 남자여서일까. 그래서 험버트의 무죄를 믿고 싶었던 것일까. 이러한 남성적 에고는 영화『롤리타』(1997, 에드리안 라인)에선 더욱 두드러지는데 어린 로가 알고보니 사악한 마녀였다라는 식의 해석은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원죄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개인적 독서와 사회적 독서는 긴밀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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