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퉁 / 쌀(米)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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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3476 bytes / 조회: 4,191 / ????.11.07 01:32
[도서] 쑤퉁 / 쌀(米)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정답을 말해야 하고, 사지선다 중에 고르라면 해당사항이 없는데도 꼭 그 안에서 대답을 고르던, '지금보다는' 훨씬 고지식하던 시절에 한때 성악설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의 선한 의지가 악(惡)한 쪽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것보다 차라리 악한 의지가 선(善)하게 교화되는 것이려니 하고 믿는 쪽이 쉬웠다.

(집에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장편이 있지만)대출해 온 중편집을 먼저 읽고 이어 읽은 장편『쌀』에는 홍수로 물에 잠긴 시골 고향을 떠나 보따리 하나만 가지고 타향 도시로 온 청년 우룽을 중심으로 '대홍기쌀집'과 얽힌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홍기쌀집의 두 딸 쯔윈과 치윈, 그녀들의 아버지 펑사장, 뤼대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모두 나쁜 인간들이다. 그들은 간음하고, 살인을 교사하고, 밀수를 하고,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럴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설명은 없다. 대신 우룽과 빠오위(쯔윈의 아들이자 우룽에겐 조카)의 대사가 눈에 띈다.

"너도 나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냐? 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날 찾아온 것이냐?"
"난 지금 날 위해 복수를 하는 것뿐이야.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네놈을 증오하는지 모르겠어. 처음 네놈의 면상을 봤을 때부터 들끓기 시작하던 증오심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 나도 그런 내 마음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아마 이유가 없는 모양이야." - p. 362

신흥 공업 도시인 '와장가'라는 공간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한다. 아편, 무기 밀수, 살인, 간음... 그곳에선 세상의 악한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왜 나를 못 살게 구는 거냐, 내가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라고 우룽은 끊임없이 외친다. 그러나 우롱은 또한 누구보다도 더 빨리 악의 질서에 재빠르게 순응하고 흡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왜일까. 이유는 없다.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이유없음. 그것이 이 소설의 성악설을 지탱하는 힘이다.
사실 은유와 의미의 중첩에 탁월한 매력을 풍기는 쑤퉁의 진가는 - 이건 아마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 여성의 심리묘사에서 발휘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의 중편을 먼저 읽어보고 장편을 읽는 것도 쑤퉁이라는 새로운 작가와 친해지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

** 책을 대출해 오는 날, 제과점에 들렀었다. 한쪽에 책을 내려놓고 빵을 고르고 있는데, "이혼지침서?" 하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웬 고등학생 녀석이 남의 책을 들추고 있었다. 그 책 아래에는 '남편고르기'(하진)가 있었다. 두 권이 나머지 책들보다 작은 신국판이라 위쪽에 올라가 있었던 것. 그 나이 때는 원래 수줍어하고 부끄러움이 많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요즘 애들은 정말이지 귀여운 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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