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태백산맥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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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724 bytes / 조회: 4,344 / ????.12.28 18:42
[도서] 조정래 / 태백산맥


집에 아직 읽지 않은 반질반질한 전집 세 질이 없었다면 주문해서 책장에 꽂아놓고 편하게 읽었을『태백산맥』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 보니 숨바꼭질을 하듯 누군가와 대출일이 계속 엇갈리는 바람에 무려 5개월이나 걸려버렸다. 그래도 올해 안에 읽은 것이 어딘가 싶다.

내게『태백산맥』의 '조정래'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낭만적인 커뮤니스트(communist)'라고 하겠다.
오늘의 현실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순류는 현대인들에게 지나간 시대를 기록하는 것은 다가올 세대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을 숙제로 안겨준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패자의 역사는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사는 흐른다'.

『태백산맥』은 민족의 분단 격동기를 향한 작가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간혹(이라기 보다는 꽤 자주) 등장인물들 간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화'가 다소 넘침으로 인하여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감이 없지 않다.
미군과 빨치산을 대조군으로 놓고 비교하는 장면에선 미군이 우리 정부의 국군통수권을 장악한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었음에도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특히 마지막 10권에서 휴전 성립 후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헌영의 숙청에 이르렀을 때는 "아아, 이런…" 했다. 지나친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오히려 긴장을 와해시켜버린 것인데 리얼리티대신 감상이 부각되어버린 탓이다.

『태백산맥』을 읽을 무렵 중국의 현대소설 몇 권을 함께 읽었는데 중국소설을 읽다 보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용이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서 때문인데 그들이 사고하는 과정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정반합의 전형을 따르는 '순진성'이 있다. 이들과『태백산맥』의 빨치산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바로 이 '순진성'이다. 동지를 위해 헌신하고, 당령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충성하는 그들의 순수하고 순박한 열정은 무척이나 인간적이어서 마치 윤리 교과서를 읽는 듯 하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정말 순진한가? 라고 물으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대라,고 하면 나는 아마 한동안은 '순진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분단 전쟁과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6권 이후부터 이런 감상적인(?) 장면이 시시때때로 등장하는데 박헌영이 숙청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대화에서도 그랬지만 이현상 남부군 대장이 빨치산 투쟁 중에 보여주었던 그의 전설적인 휴머니티를 칭송하는 부분은 그 옛날에 우스개 소리로만 들었던, 북한 교과서에 등장한다는 '김일성 장군은 나이 열 몇살에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얘기만큼이나 동화적으로 읽힌다. 아마 나의 '순진성'이 그만큼 많이 퇴색되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이 소설이 실제로는 80년代에 씌어진 이유일 수도 있다. '80년代'. 이 한 마디로도 참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태백산맥』의 장점이라면 대하소설임을 감안할 때 열 권이라는 숫자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는 대중성을 빼놓을 수가 없다. 사실,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소설의 전반부에서 이야기의 진행이나 흐름과 상관없이 생뚱맞게 등장하는 성애 묘사는(예. 외서댁과 염상구, 하대치와 주막집 주모) 신문 연재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던 어려운 시절에 어렵게 세상에 나온 소설의 무게와 위치를 생각할 때 사뭇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뭐, 남자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다. 사실『태백산맥』에는 여러모로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남자의 의리, 남자의 신념, 그리고 강한(?) 남자 등등.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가장 애정을 느꼈던 인물은 죽산댁(염상진의 아내)과 김사용이었다. 죽산댁은 그야말로 거친 격랑의 한 시절을 온 몸으로 버텨내는, 시대를 대변하는 민중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고, 또 한 사람 김범준, 김범우 형제의 아버지 김사용은 죽산댁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모습으로 소설의 지면을 벗어나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는 인물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간혹 지나치다 싶은 관념적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좌익과 빨치산, 제주도 4.3 항쟁, (충분하지는 않지만)거제도 수용소 등 군사독재의 그늘에 묻혀서 오랫동안 왜곡된 채 은폐되어 있던 기형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내고 근대를 살아낸 농민의 치열하고 가슴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밀도 있게 보여주는『태백산맥』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이 지탱해야 할 사회적, 역사적 기능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

역사를 배우고,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또한 후대에게 물려줘야 할 의무이다. 역사를 안다는 건 인간이 사람답게 사는 첫 번째 걸음이기 때문이다.
대하소설은『태백산맥』이 네 번째인데 문학적 의의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문학적인 면만 봤을 때는 개인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던 대학 2학년 때 황석영 광팬인 선배가 막무가내로 안겨줘서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장길산』에 조금 못 미치는 듯 하다. 둘 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 흔히 '막시즘'이라고 부르는 마르크스 사상의 요체는 사실 그의 대표 저서가『자본론』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이후 정치 경제학으로 발전하는 '경제사'다.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제3의 물결』에서 권력의 이동이 초기의 '노동'에서 (장원을 소유한)'영주'에게로 옮겨오는 과정을,『권력 이동』에서는 이들 권력이 근대를 지나면서 '정보(information)'를 차지하는 자에게 이동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역사는 권력, 즉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계층 간의 엎치락 뒤치락으로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계층(=자본을 소유한 권력자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선행 과정으로 계급 투쟁이 필연적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계급 투쟁의 사상적 무장과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바로 막시즘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에 막시즘은 계급 투쟁에 공고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최고의 '주의'였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 상황을 겪기는 했지만 막상 막시즘의 광풍이 몰아친 지역은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이 아니라 여전히 농토가 국부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러시아를 비롯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였다. 왜 하필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을까. 이는 막시즘의 사상적 기초 중 유물 사관(=역사적 유물론)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 생산력의 주체, 생산 관계의 부조리, 소유의 불평등이 가장 집약되어 나타나는 모델이 바로 농민과 지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배경 역시 농노해방과 新기계 문명이 충돌하면서 이러한 계층간 불화가 극에 달하면서였다. 이로써 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을 집어 삼키고 있을 때 동아시에선 막시즘이 확산되고 있었던 배경이 설명된다.
유물론은 역사를 필연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는 거의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98%의 우연과 2%의 필연 쯤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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