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주걸륜 / 말할 수 없는 비밀 스포일러 있습니다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상륜은(주걸륜) 전학온 첫 날,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구(舊)음악실로 향하고 그곳에서 우연히 샤오위(계륜미)를 만난다.
샤오위는 특이한 여학생이다. 툭하면 수업 시간에 빠지고, 친한 친구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상륜은 왠지 샤오위에게 이끌리고 샤오위 역시 그런 눈치다. 두 사람은 방과 후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거나 레코드 가게에서 음악을 듣고 바닷가를 거니는 등, 아름다운 교정과 평화로운 마을의 풍광 속에서 그들만의 추억을 하나 둘 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샤오위는 상륜에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상륜이 들었던 연주를 들려주고 연주가 왜 그렇게 빠르냐고 투덜대는 상륜에게 "집에 돌아가려면 빨리 연주해야 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사소한 오해와 함께 갑자기 사라진 샤오위. 상륜은 샤오위의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의 엄마로부터 그녀가 아프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졸업식날, 강당에서 졸업생 대표로 피아노 연주를 하던 상륜은 강당 입구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샤오위를 발견하고 그녀를 쫓아간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후 내용은 생략.
<황후화>에서 궁리(공리)의 둘째 아들로 등장했던 주걸륜이 감독, 각본, 주연까지 도맡아서 만든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전면에 펼쳐지는 '비밀'은 그러나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다. 영화를 좀 봤다고 자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가 시작한 직후에 이 영화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가 내세우는 반전 구조는 이미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줄 만큼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는 재미를 느끼기 힘들다. 그러면 남은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반전 영화가 보여주었던 반전 구조를 어떻게 차용했는가(=패러디) 하는 것인데 주걸륜만의 화법, 그러니까 뭔가 새롭거나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쪽으로도 딱히 즐거움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오마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표절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1999년에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반전'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던 모 영화에서부터 <나비효과>에 이르기까지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기존의 영화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영화다. 그러니 영화를 많이 보지 않은 사람, 또는 최소한 2004년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는 아직 생소한 10대~20대 초반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구성을 무척 색다르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만 그게 아니라면 영화를 보는 내내 국내 영화를 포함, 대여섯 개 영화의 짜깁기를 보는 듯 기시감을 느낄 확률이 크다.
영화의 미덕이라면 예쁜 영상, 영상과 잘 어울리는 OST, 사소한 장면이지만 디테일을 잘 살린 것, 그리고 어쨌든 관객이 좋아할 만한 엔딩을 들 수 있겠다.
'반전'과 상관없이 본다면 그럭저럭 볼만 하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같은 류의 감성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도 좋아할 것 같다.
주걸륜의 연기는 쫌... 전작 <황후화>와 비교하면 도식화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정우성 같다고 할까. 곧 다른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이건 섣부른 얘기일 수도 있겠다. 계륜미의 연기는 좋았다.
마지막으로, 영화 리뷰 사이트에서 이 영화에 쏟아지는 해석을 읽으면서 참으로 즐겁게 웃었다.
이 영화는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보면서 이상하다 싶은 건 다시 보면 이해가 갈 것이고, 다시 봤는데도 이해가 안 간다면 그건 감독의 실수 혹은 장난 혹은 애교쯤으로 봐주면 어떨까 싶다.
:::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가득
1. 이런 종류의 '시간여행 영화(time travel flim)'의 가장 큰 맹점은 결말에 있다.
시공간 이탈이라는 주제를 잘 이끌어가던 영화가 결말에 이르러 그때까지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이유는 대부분 무리한 해피엔딩에 집착하기 때문. 주걸륜이 기존의 반전 영화의 공식과 시간여행 영화의 구성을 그대로 답습했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을 버렸더라면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을 텐데.
2. (1의 연장) 영화는 반전을 감추려고 몇 가지 트릭을 준비해 놓지만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술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음악실에서 연탄곡을 연주하고 있을 때 선생이 들이닥치는 장면처럼. 거짓말인줄 이미 다 아는데 거짓말이 아니라고 우기니 오히려 실없어 보인다. - 이런 부분을 보면 주걸륜은 어쨌든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를 '반전'에 둔 것이 틀림없는 듯.
3. (역시 1의 연장) '시간여행'을 주제로 한 영화가 곧잘 빠지는 오류는 과거가 미래의 개입으로 원래의 미래가 아닌 새로운 미래를 가질 수 있다고 설정하는 것인데 이건 순전히 극의 마지막에 등장시키려고 준비해둔 해피엔딩이 원흉이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므로써 미래를 바꾸는 것에 관해선 근래에 나온 영화 중 <데자뷰>가 양자역학을 들어 잘 설명하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의 과거(혹은 현재)는 하나의 미래 밖에 못 가진다. 즉, 과거A는 미래A를 미래AA로 바꿀 수 없다. 과거AA가 발생해야지만 미래AA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인데 쉬운 예로, <터미네이터 2>의 결말을 보자. 존은 계속해서 기계를 과거로 보내 과거를 바꾸려고 시도하지만 과거를 바꾸는 데 실패하고, 결국 일어날 미래는 일어나고 만다. (과거A -> 미래A). 이와 유사하지만 조금 발전된 흥미로운 결말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로는 <12몽키즈>가 있다.
중요한 점은 이때, 새롭게 발생한 '과거AA -> 미래AA'는 '과거A -> 미래A'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원래의 시공간에 또다른 시공간, 즉 두 개의 시공간이 발생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옳다. 혹은 <프리퀀시(Frequency)>나 <나비효과>에서처럼 미래가 과거에 개입하므로써 현재의 나에게 또다른 기억이 생성되는 방식도 설득력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지고 있는 오류는 미래의 샤오위가 과거의 상륜에게 개입하고, 과거의 상륜이 다시 미래의 샤오위에게 개입하므로써 원래의 과거를 둔 채 새로운 미래로 바뀐다는 설정인데 영화대로라면 영화속 시공간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엉켜버린다.
'시간여행 영화'가 과학적 오류를 벗는 건 간단하다. 그저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4. 마지막 장면인 졸업 사진은 영화의 가장 큰 오점이다. 차라리 사진이 없는 것이 나았다.
엔딩이 흐른 뒤 무수한 질문을 남기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여운이란 작품에 전적으로 공감할 때 그 위에 남는 '덤'이다.
5. 이건 주걸륜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건데, 상륜이 샤오위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의 콘티를 짤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
필름을 끼워 넣는 교차 편집에, 그 장면에 삽입하기 위해 골랐을 음악에, 상륜을 잡는 카메라의 위치에, 조명까지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샤말란 측에서 표절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