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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1050 bytes / 조회: 3,977 / ????.03.11 02:44
[도서] 속죄 Atonement, 이언 매큐언


내용 중에 스포일러 있습니다

 



"몰란드 양, 당신이 품어온 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겁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이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영국 사람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인이지요. 제발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똑바로 보고 이해하고 판단해주세요. 그런 잔혹 행위를 해도 된다고 교육받은 적이 있습니까? 법이 그런 것을 묵인해 주고 있나요? 사람들간에 직접적인 왕래와 서신 교환이 잦은 이 나라에서, 남의 눈을 피할 길 없는 이 나라에서, 도로와 신문 덕분에 세상에 비밀이란 남아 있지 않게 된 이 나라에서 그런 잔혹 행위가 비밀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몰란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그들은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제인 오스틴,『노생거 수도원』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소설『속죄』의 첫 머리에 작가가 인용한 제인 오스틴 소설의 한 대목.

책 읽는 걸 싫어하는 M이 영화《어톤먼트:Atonement》를 본 직후 원작소설에 관한 것 그러니까 "실화인가" 등을 물어왔다. 영화의 결말이 아마 열린 구조였던 듯...
얘기를 듣다 보니 호기심이 생기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가능한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순서를 선호하기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놔두고 소설『속죄』를 주문했다.

띠지의 포스터가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인게이지먼트 : A very long engagement》를 떠올리게 하는『속죄』는 어린 소녀 브리오니의 사소한 오해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의 인생이 뒤틀리는 1부, 1부에서 인생이 꼬여버린 로비가 전쟁에서 겪는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좇아가는 2부,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속죄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입학을 포기하고 세실리아의 뒤를 이어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브리오니의 3부, 마지막으로 59년이 흐른 뒤 후일담인「1999년 런던」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를테면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는 브리오니의 1인칭 서술로 시점이 바뀐다.용요약하면 , 소설의 제목『속죄』는 어린 시절 자신이 한 거짓 증언 때문에 인생이 뒤틀려버린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브리오니가 속죄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기인한다.

읽는 동안 아마 서너 번쯤 소설을 팽개쳤던 것 같다.『속죄』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그것이 픽션인 걸 알면서도, 지면을 벗어나 읽는 사람의 정서를 움켜쥐고 뒤흔드는 핍진성이 불편한 소설이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 M과 나눈 몇 마디 대화와 책을 주문할 때 잠깐 읽어 본 서평으로 소설의 방향을 미리 알고서도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 세 사람의 인생이 뒤틀리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기란 쉽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안의 감정선이 픽션을 픽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설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결국 중반까지 읽었을 때, 책을 내려놓았다. 소설을 끝까지 무사히 완독하려면 아무래도 '브리오니' 이 멍청하고 바보같은 기집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브리오니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정에 빠져있는 13세의 소녀다. 삶에 이면이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어린 브리오니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에 더 익숙하고, 선악의 경계는 완벽하게 분명해야 하며, 자신이 쓴 동화 속 질서가 그러한 것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권선징악적 구조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런 브리오니가 어느 날 어떤 장면을 목격한다.


소리가 사라진 영상은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 모 통신사 광고가 소리를 제거한 영상을 먼저 보여준 다음, 다시 소리를 입힌 영상을 보여주는 CF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브리오니가 듣지는 못하고 보기만 한 장면들은 이렇다.

장면 1. 세실리아는 속옷만 남긴 채 옷을 모두 벗고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젖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 광경을 로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다.
장면 2. 어두운 서재에서 세실리아가 로비에게 붙잡혀 신음하고 있다.
장면 3. 경찰에게 연행되는 로비에게 달려가는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수갑에 채워진 로비의 옷깃을 잡고 흔든다.

브리오니가 지켜본 위의 장면은 모두 소리는 거세되고 영상만 남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상에 소리가 입혀지면 진실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본 것만 믿을 뿐 그 이면을 들여다 볼만큼의 통찰력이 없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의 세계는 주어와 동사만 존재하는 직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보는 세계의 질서는 그렇듯 간단하다.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브리오니의 눈에 로비는 악당이고 그래서 브리오니의 주변에 벌어진 흉악한 범죄의 죄인은 악당인 로비여야 한다. 이것이 13세 소녀의 논리다.


어른이 아이와 다른 점은 어른은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인 집, 인형, 자동차 등의 장난감으로 어른들의 흉내를 내지만 그것은 언제든 재생산이 가능한, 불행이 없는 모방의 세계다. 이러한 모방의 세계에 익숙한 아이는 어른과 달리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썼던 동화 속에서 주인공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행복해지고 악당은 벌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현실 세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속죄』는 소설 본연으로서의 재미도 재미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가 바라보는 '작가'에 대한 시선이 흥미롭다.
브리오니가 그들 세 사람에게 일어난 상황을 실제와 다르게 구성해서 출판사에 투고했을 때, 출판사 편집장이 원고를 되돌려 보내면서 밝히는 거절 사유가 무척 인상적이다.

 

소녀가 자기 앞에 펼쳐진 이 이상한 장면을 완전히 오해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것이 젊은 남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을 맺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여자의 부모님에게 폭로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부모는 분명 맏딸이 파출부의 아들과 사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젊은 남녀가 소녀를 연락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p.438, 3부

 

 

여기에 작가는 덧붙인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결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들에서 독자가 희망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이 가져올 장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들에게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 p.520, 
1999년 런던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p. 521, 1999년 런던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면 3부까지만 읽기를 권함.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소설은 스토리 텔링이 뛰어나고 흡인력이 강해서 쉽게, 잘 읽힌다.
작가의 사실주의를 느낀 부분은 3부의 뒷 부분. 이전까지의 끈질기고 집요한 문체 대신 서두르는 듯 호흡이 들쑥날쑥한 문체가 등장한다. - 이러한 문체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중간 중간, 전혀 졸음이 올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금씩 졸았는데 거의 100여 페이지나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졸았던 문단은 여지없이 내가 뜨악해하는 의식 흐름의 기법이 쓰였다.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이러한 문체는 버니지아 울프나 프로스트처럼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체라기 보다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느낌이 있다. 물론 읽는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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