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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4960 bytes / 조회: 4,270 / ????.07.02 18:10
[도서] 이 한 / 조선기담


「연애소설 돌려보다가 왕에게 반성문 쓴 선비들」
어느 늦은 밤, 정조는 자신의 곁에서 사초를 적고 있던 주서(注書)를 예문관에 보냈다. 그곳에는 김조순과 이상황 등의 몇몇 관리들이 숙직을 하고 있었다. 주서가 보게 된 것은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산더미같이 쌓인 책들을 읽고 있는 숙직관리들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읽고 있었는지 인기척이 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공부하는 그것과는 묘하게 틀렸다. 이상하게 생각했을 즈음, 주서의 눈에 그들이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평산냉연》. 주서는 깜짝 놀랐고, 이 사실은 정조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게 되었다.《평산냉연》이란 장르를 구분하자면 청대의 정인소설(情人小設)이다. 좀 더 자세히 나누자면 재자가인소설(才子佳人小設)로,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다. 절세미남에 능력도 뛰어난 주인공이 역시 절세미녀에 똑똑한 여주인공을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하고 사랑을 꽃피운 다음, 주인공은 과거에서 장원급제하고 황제의 칭찬 속에 축복받은 결혼식을 올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그만큼 읽기도 쉽고 편안했을 것이다.
《평산냉연》뿐만 아니라 당송 시대의 소설도 함께 있었다고 하니, 아마 예문관의 숙직 담당 관리들은 서고에 있었거나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소설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와서 돌려보고 있었떤 것 같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정조에게 알려졌다.
정조는 신하들이 공부는 안하고 연애소설을 돌려봤다는 것에 크게 진노하여, 관련자들을 파직시키거나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처벌했다. 이 중 이상황이 특히 무거운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본다면, 그가 소설을 가져온 주모자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요즘의 감각으로 생각해보면, 겨우 소설을 읽는데 지나친 처벌인 것도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신하 중 훗날 정조와 사돈이 되었고,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던 안동 김씨 가문의 김조순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pp.292-293,『조선기담』,

『조선기담』은 '사회기담', '왕실기담', '선비기담'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위 얘기는 이중 '선비기담'의 네번째 얘기다.
(현재로 치면 엘리트 코스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성균관의 젊은 인재들을 사로잡은 연애소설의 내용이 특히 눈길을 끈다. 과거에 장원급제 하고 황제의 칭찬 속에 축복받은이라니... 우움~ 선비들의 로망이란 그런 것이군~
남녀를 막론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은 다 똑같은 것인지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일 때 일인데 시험 기간에 교과서 안에 로맨스소설을 숨기고 읽다가 그만 엄마한테 들켜버린 것이다. 예문관 선비들과 나의 차이점은, 선비들은 다시는 연애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썼다는 것이고 나는 로맨스소설로 먼지나게 맞았다는 정도. 반면에 정조와 우리 엄마의 공통점은, 죄인으로부터 깊은 반성과 함께 다시는 연애소설(혹은 로맨스소설)을 읽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는 것쯤 되겠다.
그러나 아마 이후에도 선비들은 정조 몰래 연애소설을 읽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정조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줬을 것이다. 우리 엄마처럼.
뭐 어찌 됐든, 나는 저 선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심으로.
이외 기억에 남은 건 '사회기담'인데 이 책을 읽을 무렵 아주 드물게 무서운 꿈을 꾸고 새벽에 잠자리를 설쳤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사회기담'을 읽는 동안 느꼈던 무서움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때로 상상이 만들어내는 막연한 이미지가 감각적이고 선명한 진짜 영상보다 더 현실적이고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덧.
제목에 '기담'이 자리잡고 있느니만큼 재미있고, 기묘한 얘기들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졸리는 책이었다. 수면제 대용으로 구입을 할까 살짝 고민했을 정도. 서너 페이지 넘어갈 때쯤이면 예외없이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는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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