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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7729 bytes / 조회: 4,571 / ????.07.20 14:23
[도서] 정미경『나의 피투성이 연인』外



보통 독서는 독서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이를테면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나 소설을 찾아서 읽게 된다던가,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리뷰어의 리뷰를 참고하게 된다거나 등등이 그것이다.
정미경 작가는 온라인 서점에 신작 소개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클릭했다가 거기에 달린 리뷰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우리 동네 도서관에 그녀의 소설이 있어서 읽어보고 구매를 결정해야지 했는데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 뜬금없고 기약이 없는 일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출간 소설중 한 권을 제외, 신작 소설을 포함한 그녀의 소설들을 모두 주문했다. 빠진 한 권은『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인데 운동권 후일담 소설. 나는 (특히 여성작가가 쓴)운동권 후일담 소설에 알러지가 있다.
이전에 접한 적이 없는 생소한 작가의 소설을 한번에 주문한다는 건 확실히 모험이지만 신작『내 아들의 연인』을 제외하고 내리 세 권을 차례로 읽은 소감은 '만족'이다. 작가의 감각적인 정서가 감각적인 문체로 잘 정서된 느낌이 든다.
소설속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차분하고 조근조근하지만 무거운 내용에 비해 막상 읽히는 건 그다지 무겁지 않다. 깊긴 하되 가라앉지는 않는다고나 할까. 자기안으로 파고들다 못해 침잠해버려서 나중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헤매는 작가들이 많은데 정미경 작가는 그들에 비하면 영리하구나 싶다. 소설을 읽는동안 소설 속 각양의 인물들이 간직한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과 보듬어 안는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작가의 기본 정서는 '가벼움'이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
깊이와 무거움이 다르듯 가벼움과 경박 역시 다르다. 개인적 소감으로 정미경 작가는 그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장밋빛 인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단편 소설집이고 남자와 여자의 얘기다. 작가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남자인 소설이 대부분인 것이 눈에 띈다. 이중『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첫번째 수록인「나릿빛 사진의 추억」을 읽을 때였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는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책장을 펼치고 예의 조근조근 차분하고 감성적인 문장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고 말았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한 여자랑 연애를 했는데 이 남자가 정말정말 가난한 남자였던 거다. 얼마나 가난한가 하면 연애를 하는 동안 찍은 사진을 현상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결국 여자랑 헤어지고 1년이 지나는동안 남자는 현실을 받아들여 한 개인병원의 엑스레이 사진사로 취직 한다. 덕분에 헤어진 여자랑 찍은 사진도 현상할 수 있게 됐다. 근데 이게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맥주 한 잔 하면서 현상한 (야한)사진들을 보니 취기도 오르고 아무래도 여자에게 돌려줘야겠다 싶다. 그래서 여자한테 전화를 하지만 1년 전에 헤어진 여자는 이미 예전의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었고, 여자는 사진은 남자가 처리하라고 냉정하게 군다. 통화 직후에 남자는 사진과 필름을 모두 오려서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린다.
그런데 이튿날 갑자기 여자가 찾아와서 사진을 내놓으라고 떼를 쓴다. 알고보니 여자는 결혼을 목전에 앞두고 있고, 남편 될 남자가 제법 알려진 유명인이었던 것. 그런데 그 남편 될 남자가 여자한테 사진과 필름을 찾아오라고 시킨다. 남편 될 남자는 여자의 과거는 괜찮지만 여자의 옛애인이 사진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용납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는 그럴 생각도 없고, 사진과 필름도 모두 버렸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그날부터 남자의 직장에 무시무시한 문신을 한 남자들이 죽치고 앉아서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없는 사진과 필름을 내놓으라고 하니 남자는 난감해진다. 여자는 매일같이 징징대고, 어깨들은 매일같이 병원 로비를 차지하고 앉아서 남자를 겁준다.

숨넘어가게 웃다가 이쯤에서 M군에게 전화했다. 위의 줄거리를 들려줬더니 M군이 웃지도 않고 "그럼 사진을 다시 찍어야지 뭐" 했다. 물론 소설의 결론도 그러하다. 남자와 여자는 다시 한번 옛정을 불태우고 여자의 사진을 찍고 그리고 해피엔딩인 거지.

놈들은 실내를 빙 둘러보더니 발은 안 아프고 소리만 요란한 것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쓰레기통이나 입구에 줄지어 선 링거 걸이 같은. 조폭? 입 모양만으로 김 간호사가 묻자 최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원장 안 나와? 이거 병원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외친 놈이 양복 윗도리와 쫄티를 순식간에 벗어던지며 앞으로 나섰다. 비늘 하나하나가 선명한 용의 목이 젖가슴을 향해 내려와 있고 나머지 부분은 등 쪽으로 넘어가도록 그려진 문신이었다. 초음파나 엑스레이 기사를 하다 보면 갖가지 모양의 문신을 보게 되고 어지간한 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배꼽이나 젖꼭지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문신을 한 사람이 와도 겁날 건 없었다. 촬영을 위해 불쾌한 액체를 삼킨 채 기계 위에 누운 인간처럼 겸손하고 무욕한 사람을 딴 곳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우니까. 침묵을 깬 건 최 간호사였다.
"어머, 컬러 문신이야."
- p.24,「나릿빛 사진의 추억」

* 위 단편은 작가의 소설 중 거의 유일하게 코믹적인 요소가 부각된 소설.

좋아하는 우리나라 여성작가 리스트에 정미경 작가도 추가해야겠다.
김진규 작가의『달을 먹다』도 참 인상깊게 읽었는데 이 작가는 다음 소설을 읽어 봐야 확실히 알 것 같다. 작가의 최초 소설이라는『달을 먹다』는 읽다보면 작가가 치솟아 오르는 감성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듯 약간의 요철이 느껴지는데 이 부분은 참 좋구나... 하다가도 어, 이 부분은 좀... 하는 식의 오락가락하는 독서를 했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근의 가벼움, 경쾌함의 외투를 뒤집어 쓴, 그러나 알고 보면 경박한 몇몇 칙릿류 소설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결론은 이런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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