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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1308 bytes / 조회: 5,593 / ????.08.15 18:31
[영상] 동정 받는 악녀《태양의 여자》KBS2


줄거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인기 아나운서 신도영(김지수)은 사실은 자식이 없는 신 고문 - 최 교수 부부에게 입양된 고아다. 그러나 입양 후 양부모에게서 생물학적 친딸인 지영(이하나)이 태어나자 파양에 대한 두려움과 떼쟁이 지영에 대한 순간적인 미움과 원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민족대이동이 있는 설날, 복잡한 서울역에 지영을 버리고 만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르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재회한 도영과 지영.
고아원에서 지어준 윤사월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지영을 먼저 알아 본 사람은 도영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명예홍보대사이면서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진 도영은 지영을 버린 것이 밝혀질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윤사월이 지영인 것이 밝혀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막는다.

 

80년대식 통속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등장한 이 드라마는 초기의 저조한 시청률을 딛고 높은 시청률 속에 종영했는데 드라마 주인공인 신도영은 특이하게도 악녀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이유 있는 악역'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이유만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해도 된다는 얘기처럼 들려서 영 별로다. 그렇다고 해서 도영을 향한 시청자들의 동정과 연민이 근거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리하여 주인공으로 악녀를 선택한 드라마《태양의 여자》는 시작부터 몇 가지 딜레마를 안고 출발한다.

기존의 여타 드라마에 등장했던 악녀와 도영이 차별화 되는 지점은 명명백백하다. 도영은 대한민국 최고의 아나운서로 성공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입양되었던 집과 양부모의 곁에서 머물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도영의 악행이 개인의 야망이나 성공에 있지 않고 가족에게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도영의 악역이 설득력을 가지는 중요한 동기로 전혀 손색이 없다.

마음을 주지 않는 엄마 최 교수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도영은 애정에 굶주린 아이와 하등 다르지 않다. 드라마 후반, 도영에게 "너한텐 사랑받고 자란 사람 특유의 빛이 없다'"던 사월의 대사는 선과 악의 경계 쯤에 걸쳐있는 도영의 위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결국 도영이 어린 시절 찰나에 저지른 '나쁜 짓'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파양에 대한 두려움, 즉 가족을 잃고 세상에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도영의 공포는 작가의 의도대로 시청자가 악녀 도영을 이해하는 소통의 창구가 된다. 문제는 시청자는 그렇다 치고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인물 거의 모두가 도영을 '기꺼이' 이해하고, 용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바로 이 부분, 도영을 너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주변인들이었다. 극본에서 대사는 대화, 독백, 방백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희한하게도 도영의 주변인들이 도영의 독백, 방백까지도 모두 다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도영에게서 진실을 알아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 구체적으로 준세(한재석)와 동우(정겨운)가 도영에게 궁금한 것은 그저 "사월이 지영이가 맞는가" 하는 것일 뿐 과거에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영이 동생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뿐만아니라 진실을 덮으려는 도영에 맞서 사월이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이 신-최 부부가 잃어버린 딸 지영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후에도 그들은 도영에게 동생을 버린 일, 사월이 지영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꾸몄던 일들에 "왜 그런 짓을 했어?" 묻는 대신 오히려 사월에게 "언니를 용서해주면 안 되겠니?" 한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과 말투는 마치 도영이 오랜 시간 동생을 버린 죄책감과 양부모로부터 애정결핍을 느끼며 살아온 힘든 시간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영의 '대화'는 온통 거짓말로 가득한데도 그들은 도영의 '방백' '독백'까지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도영을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인가? 이쯤되면 작가가 도영을 지나치게 애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렸던 반면 정신적으로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결핍에 힘들어하는 도영에 비해 사월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빈곤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게 보이는 건 드라마속 인물들이 사월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떠들고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서 드라마를 향한 두 번째 불만이 생겨난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와 집을 잃고 고아가 되었지만 특기할 만한 별다른 정신적 트라우마 없이 밝고 건강하게 성장한 사월의 캐릭터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일견 판타지로까지 보인다. 물론 고아라는 이유로 고등학생 때 급우들의 수학여행 경비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기도 하고, 졸업 이후엔 소매치기를 당하는 등 먹고 사는 생활의 고단함을 살짝 비쳐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달리는 차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정도의 고생으로는 도영을 향한 사월의 복수에 힘을 실어주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입양된 뒤 파양의 두려움에 떠는 도영의 내면에 집중하느라 하루 아침에 멀쩡한 부모를 놔두고 고아가 되어버린 사월에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던 걸까.

드라마 초반, 도영과 직접적인 갈등 구도가 만들어지기 전 사월이 몇 년을 기다린 끝에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동창의 결혼식에 찾아가 동창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이 장면을 보고 아, 혹시 이건 나중에 사월이 도영에게 복수를 하는 복선이 아닐까? 가슴이 뛰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우여곡절 끝에 백화점 VIP 담당 퍼스널 쇼퍼로 취직한 사월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동창에게 몇 년을 기다려 기어이 복수를 하던 그 독하고 매섭던 인물이 아니라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전형적인 캔디형 인물로 변신해 있었다.
물론 밝고 명랑한 사람은 독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살벌하고 피말리는 복수와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드라마 속 도영의 악녀 역할에 당위성을 주기 위해 작가가 쉽고 편한 길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사월이 밝으면 밝을수록 도영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은 점점 더 이해하고 감싸줘야 할 연민으로 윤색된다. 즉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부모와 헤어져 고아로 자란 20년의 세월과 양부모 옆에서 외롭게 산 20년의 무게를 재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가? 내가 고아가 되기 싫어 멀쩡한 아이를 고아로 만든 행동이 과연 그렇게 쉽게 용서받을 행동인가. 이 드라마의 주제는 혹시 "맞은 자는 발 뻗고 자고, 때린 자는 웅크리고 잔다" 인가?
박완서 소설『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선 밥 한 숟가락, 고구마 한 쪽을 더 먹기 위해 피난 길에 다섯 살난 동생을 버리는 일곱 살난 언니 수지가 등장한다. 이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수지는 동생을 찾아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동생을 외면한다. 도영과 수지의 차이점은 수지에게서 보여지는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속물적 근성이 도영에게선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지의 가식과 위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라면 도영의 경우는 작가가 나서서 이래도 안 불쌍해? 이래도 용서해주지 않을 거야? 응석을 부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동창의 결혼식에서 살기등등하게 복수를 해치웠던 사월은 작가와 두 남자의 일방적인 '신도영 응원'으로 독기가 빠져 버리면서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인물로 전락해버린다.

9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드라마《모래시계(SBS)》에 등장하는 장면중, 80년 5월 18일 광주에 우연히 우석(박상원)과 태수(최민수)가 스쳐가는 내용이 있다. 우석은 진압군, 태수는 시민군이었고 우석은 태수를 봤지만 태수는 우석을 못 본다. 시간이 꽤 흐른 뒤 검사와 깡패로 다시 만났을 때 우석은 그날 광주에 나도 있었다,고 어렵게 고백한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우석에게 태수는 "중요한 건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도영에겐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다. 준세와 동우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던 난 네 편이야" 강조했고, 사월마저도 "어렸을 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도영에게 기회를 주었다.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 것은 도영 자신이다. 동생을 서울역에서 잃어버린 사실을 어른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어린 도영은 성인이 되어서는 사월이 지영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은폐하고자 한다. 어릴 땐 '못'한 것이고, 성인이 되어서는 '안'한 것이다. 도영의 의도와 의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었다. 동정은 하되 그녀가 저지른 죄를 가볍게 여겨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뱀발 ::::

1. 이제껏 봐왔던 드라마속 숱한 찌질남중 베스트오브베스트를 뽑으라면 단연코 차동우다. 나중에는 차동우가 등장할 때면 채널을 돌려버렸다.
2. 도영을 미워한 것은 결코 아니다. 도영이 불쌍했고 왜 저렇게 해야만 했을까 안타까웠고 마지막 장면에선 정말 청승맞게 울어댔다.
2.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종영했던 SBS 드라마《일지매》의 최종회에서 '일지매'(이준기)는 살아 있음이 충분히 암시되었고,《태양의 여자》는 역시 최종회에서 '신도영'이 죽었음이 충분히 표현되었다. 그럼에도 살았다, 죽었다 의견이 분분한 '일부'(라고 믿고싶다) 시청자들을 위해 해당 드라마의 PD들이 나서서 살아있다, 죽었다 설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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