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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27073 bytes / 조회: 4,731 / ????.10.07 12:45
[도서] 박경리 / 토지



 

1.
완독 후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토록 찬사가 쏟아지는 이 소설에 제대로 된 비평도 서평도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찬사에 비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찬사’인지는 굳이 옮기지 않겠다.

 

2.
1, 2부는 훌륭하다. 이야기를 엮어 내는 힘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고 이야기의 응집력도 대단하다. 생명력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누구 하나 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굉장한 감정이입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지문과 대사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이 당연한 얘기를 왜 언급하는가 하면 3부를 지나 4부에 이르면 ‘대사와 지문의 역할’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사와 지문은 소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능적 요소로써 작가와 독자의, 작가와 문학의 약속이다. 그런데 3부 중반 이후부터 이러한 당연한 약속이 흐지부지되는 광경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실험성이나 독창성 등의 작가의 '새로운 시도'로 이해할 범위를 넘어선다.

 

 

3.
3, 4부에선 지문과 대사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데(5부에선 한결 깔끔해진다) 그중에서도 지문이 대사인지, 대사가 지문인지 구분하기 힘든 장면과 마주칠 때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소설 속에서 대사란 인물과 인물 간에 주고 받는 것이 규칙이다. 그러나『토지』에서는 한 사람의 대사가 지문이나 상대방의 말줄임표 없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꽤 있다.

 

 

4.
심지어 5부에 들어서면 느닷없이 ‘독자는 기억하는가’ 운운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들기까지 한다. 그렇지 않아도 5부는 양현과 영광, 오가다와 인실의 사랑 때문에 통속극의 분위기가 짙은데 거기에 변사의 역할을 하는 작가의 지문이라니. 다행히 이런 지문은 한 번만 등장한다.

 

 

5.
문장 성분의 호응에 문제가 있는 단락이 여러 권에 걸쳐 나타난다. 특히 ‘그러나’ ‘그래서’ 등의 등위접속사의 쓰임이 적확하지 못하여 어색한 문장이 많다. 다음은 14권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예학교의 여선생이 항의편지를 냈다 하여 만나자 한 것은 조용하의 경우 파격적인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불미스럽고 참혹한 사건, 그것은 인실이 담임하고 있는 반에는 방직공장 여공 아이가 서너 명 있었다. 그 중의 박차순(朴次順)이라는 아이가 방직공장 창고에 끌려가서 감독으로부터 추행을 당하려다 심히 반항을 하여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p.329)


 

6.
출판사 편집부의 오역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어이없는 오탈자가 몇 군데 있다. 한 예로 지문 말미에 느닷없이 쌍따옴표가 등장하지를 않나(p.232, 13권 첫 줄), 색인을 깜박 했지만, 14권인가 15권인가에선 반대로 대사가 끝나는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쌍따옴표가 행방불명이지를 않나.

 

 

7.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중과거에 대한 논란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란으로 보인다.
언어는 인간이 소통의 도구로 쓰는 것인 만큼 변화하고 진화하는 유기적인 속성을 가진다. 잘 안 쓰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낡은 언어는 이미 죽은 언어다. 중요한 건 이중과거든 뭐든, 영어식이든 일본식이든 우리말(=한글)의 체계가 그것을 모두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는 것이고 한글이기 때문에 '안 먹는다'도 '먹지 않는다'도, '먹었다'도 '먹었었다'도 모두 가능한 것.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이렇듯 우수하고 위대하고 최고로 멋진 문화 유산이다. 우리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게 정말정말 감사해야 한다.

 

 

8.
평사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1, 2부에 비해 3, 4부는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항일단체(혹은 항일운동가들),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암중모색하는 동학잔당, 서울에 모여든 신지식인 등이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들이 둘 이상만 모이면 술상을 앞에 놓고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탁상공론식 설전(舌戰)을 늘어놓기 바쁘다는 것. 그들이 늘어놓는 장광설은 툭하면 길을 잃고 헤매는가 하면 서론, 본론, 결론이 제각각 춤추다 결론도 없이 흩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며 그나마도 장광설의 주인공이 (지문을 통해 설명되듯)스스로도 습관적으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일 뿐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다고 하지를 않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회의를 느끼기까지 하니... 강조하지만 장광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맥락도 없고 요체도 애매한 대동소이한 내용의 장광설이 거듭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문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여러 번 들으면 지겨운 법.
더 나쁜 것은 3부 중반쯤부터 나타나는 '다음 중 틀린 문장을 고르시오' 하면 답으로 고르기에 딱 안성맞춤인 요상한 문장 구조다.『토지』에 쏟아지는 문학적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비문들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장광설만큼이나 독서를 피곤하게 한다.

 

 

9. (8의 장광설에 이어)
13권에 등장하는 장면 중.
서울역에서 우연히 명희를 만난 조찬하가 명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집에 도착해서, 그리고 그의 방에서 잠들기 직전까지 무려 여덟 페이지에 걸쳐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자의식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pp.176 - 188) 조찬하가 생각을 개진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다음은 리얼리스트가 어떻게 신비주의와 동일한 개념이 되는지 논리의 비약을 잘 보여주는 부분.

(…) 고래로 조선인들은 리얼리스트였었다, 나는 긍정하고 믿소. 그것은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요 방법이니까요. 신비, 생명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 그러니까 본시는 신비주의요. 현실적인 민족적 기질 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가장 깊이 파고 내려간 연유가 바로 그거지요. 신비와 생명에의 탐구는 어떠한 형식이든 창조요. 궁극적으론 창조란 말입니다. 당신들이 조선에 상륙하여 한 말 중에 무지몽매하여 미신이 횡행하는 나라, 무지몽매하다는 말은 사양해야겠고, 미신이 횡행하는 것만은 틀림없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미신도 하나의 창조이며 창조의 의지라 할 수 있지요. 그것을 긍정한다 하지는 마시오. 나는 지금 조선민족의 저류를 더듬어 보는 것뿐이니까요. 네, 조선민족은 창조적 활성에 넘치는, 그러니까 개개인이 강한 개성을 지닌 민족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소. (p.186)


 

10.
16권 후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무라가미가 병문안을 온 오가다에게 하는 '초인사상'에 대한 대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pp.351-352, 16권) 작가가 지문을 통해 따로 언급하지 않으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작가의 목소리(=주장)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대사에 등장하는 니체의 초인(超人)은 일본식 한자 조어의 예를 그대로 수용한 어휘인데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여 받아 들였다가는 자칫 오류를 범하는 낭패를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위의 무라가미의 대사에서 권력의지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초인, 즉 니체의 저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위버멘쉬는 인간성(humanity)의 개념보다는 이 땅에서 구현되고 달성되어야 할 현세적 이상이자 목표로 생명의 근원인 대지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제목이 ‘토지’인 만큼 기왕에 등장한 초인 사상이 아쉽기도 하다.
흔히 어휘는 개념의 집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사실 ‘초인=超人=초월적 인간’이라는 어휘를 가지고 위버멘쉬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기적일수도 있겠다 싶다.

 

 

11.
소설속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 관하여.
단적인 예로, 평사리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토지와 민족자본을 수탈당한 일제강점기의 그 어려웠다던 시절이 무색하게 교육과 자산 부분에서 성공을 이루고 이에 더해 신분의 상승까지 이루는 성공적인 삶이 '대체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 조정래가『태백산맥』『아리랑』등을 통해 농한기를 굶주리며 견뎌내는 농민들, 마름에게까지 수탈을 당하며 핍박받던 농민, 고리대금의 덫에 빠져 각종 부역에 팔려가는 농민들을 통해 시대를 조명했던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조준구의 탐욕을 보여주는 동시에 조준구 몰락의 계기가 되는 광산 부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가 우리 민족 자본 수탈로 이어진 전형적인 한 예인 광산 열풍이 소설에서는 다만 개인사에 머물고 만다.
소설의 시작과 끝인 1897~1945년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대하소설에서 작가의 짤막한 서술과 야무네와 석이네 정도를 제외하면 식민지 조국의 역사적, 시대적 고단함을 전달할 매개체=민중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12.
민족주의에 대한 작가의 시각(파시즘을 경계하는)이 재미있었고 이범호, 강두매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명백히 드러내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13.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얘기가 쌓여갈수록, 그러니까 뒷 편으로 갈수록 중언부언하는 장면이 잦다. 특히 석이가 조준구의 모함으로 왜경에게 붙잡혀 가는 아버지 한조의 신발을 손에 쥐고 쫓아가는 장면은 세어보진 않았지만 석이의 회상과 석이를 떠올리는 혹은 석이와 마주친 평사리 사람들의 회상과 대사를 통해 아마 대여섯 번 정도 등장했던 것 같다. 이 장면이 어린 한복이 함안의 외가에서 평사리로 돌아오던 장면과 함께 손에 꼽을 정도로 마음이 짠한 대목인 건 사실이지만(이 장면 역시 몇 차례 '언급'되지만) 과유불급이라, 아무래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14.
마지막 21권은, 앞서 등장했던 장면들이 페이지를 통째 옮긴 듯 고스란히 다시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동진이 만주로 떠나기 전 최치수를 찾는 장면, 조병수가 별당의 서희를 훔쳐보는 것을 발견하고 화를 내는 길상, 오가다와 외조카 시게루가 환국의 얘기를 나누는 장면, 오가다와 조찬하가 별장에서 제문식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 등이다. 이중에는 두 번 이상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15.
600-700여 명에 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토지』에서 나를 사로잡은 인물은 단연 김 환 혹은 구천이다.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은 픽션 속 인물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떼어 놓고 바라보게 되는 객관적인 거리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환은 그 거리를 단숨에 부수고 시시각각 지면 밖으로 튀어나와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더 할 수 없이 입체적이고 극적이며 복잡다단한 면모를 지닌 환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충돌하는데 아마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가장 뜨겁고, 가장 메마르고, 내면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인물일 것이 틀림없다. 환이 내뿜는 생생한 생명력은 그에게 동시성까지 느끼게 한다. 이야기 속에 머무는 인물이 갖는 구체성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생각하게 하는 문제적 인물.
환의 죽음이 등장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미리 알고 있었던 그래서 읽는 동안 내내 그 순간이 언제 올까 두려워했던 그의 죽음은 막상 더 없이 담백한 작가의 한 줄로 정리되었다. 마흔 줄에 들어선 강쇠가 어린아이처럼 “으흐흐흣-” 울음을 터뜨릴 때는 나도 함께 울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자 불륜과 패륜 그리고 동학의 후예로서 자신에게 남겨진 사명과 소명 그 모든 업보를 짊어지고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남자는 비록 소설이라도 흔치 않다.

 

 

16.
『토지』전반에 걸쳐 가장 아쉬운 인물은 역시 김길상이다. 조준구로부터 평사리의 토지와 집을 되찾은 서희가 용정에서 평사리, 정확하게는 진주로 돌아온 뒤 용정에 혼자 남은 길상의 행보가 영 오리무중이다. 계명회 모임이 화근이 되어 진주로 압송된 뒤 2년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뒤에도 마찬가지. 등장하는 분량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서희와 혼인 이후 길상이라는 인물 자체가 본연의 힘과 빛을 현저하게 잃은 느낌이다. 특히 2부 마지막에 용정에서 서희와 헤어진 이후 3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길상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역학적 위치는 급속도로 힘이 빠져 버렸다.

 

 

17.
『토지』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요인물 중 여성의 경우 일정한 전형성이 보인다. (공통점이 아니다)
윤 씨 부인 - 최서희 - 임명희 - 유인실 - 이양현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 중 가장 매력이 떨어지는 인물은 역시 양현. 윤 씨 부인과 서희는 가문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의지적 인물로, 명희는 가부장주의와 신문물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여성으로, 인실은 사회주의에 경도된 독립운동가로 각자 정체성의 뿌리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안팎과 부단히 싸우는 반면 양현은 자신의 뿌리를 지키려는 자존심 강한 여성도 아닌, 그렇다고 시대의 불행을 고민하는 신념을 가진 여성도 아닌 그저 관상용 꽃같다고나 할까. 예쁜 받침대 위에서 사랑받는 조화보다 하수구 옆에 핀 이름 없는 들꽃이라도 생명이 있는 것이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18.
땅을 목숨처럼 알고 땅과 더불어 사는 민중은 잡초마냥 강하다. 그러나 그 자식들, 소위 신식물을 먹고 사상과 신분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진 다음 세대에 이르면 그들 부모가 보여주었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은 보이지 않고 대신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적이며 현실도피적인 모습이 보인다. 그러므로 대하소설『토지』를 이끄는 힘은 민족 정기의 고양을 부르짖는 혁명가, 식자들이 펼치는 그들만의 논리·사상·주의·고민 같은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의 터전를 꿋꿋이 지켜내며 민족적 정취를 유감없이 뿜어내는 평사리의 농민들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스토리텔링이 강한 1, 2부에 비해 3, 4, 5부가 겉도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야기를 지탱하는 인물들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 1부 혹은 2부에서 끝을 맺었더라면 어땠을까. 3, 4,(5)부가 구성상 앞선 이야기의 연속성을 잇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과연 불가결한 전개였는가. 조정래의 대하소설이 연대별로 나누어진 것처럼 차라리『토지』도 1, 2부를 묶고 3, 4, 5부를 묶어 두 편으로 나누었으면 어땠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남는다.

 

 

19.
작가와 독자, 출판사가 모두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래서 완간 이후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책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발견되는 오자(誤字)는 물론 문법적 문장구조의 문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3부 중반을 넘어 4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작가가 어지간히 글을 쓰기 싫었나, 생각이 들만큼 뭉텅뭉텅 아무렇게나 잘려나간 문장의 어미, 오자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마침표와 쉼표를 아무렇게나 혼용한 것, 지문이 충분하지 못하여 화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한 대사, 기본 문법을 아무 이유 없이 무시한 문장들, 색인이 귀찮을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호응이 엉망인 문장, (심지어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회상 장면의 잦은 반복, 작가의 역사적 현실 인식을 읽어내기에 여러모로 부족하게 느껴지는 시대 구현에 이르기까지 아직 남은 과제가 많아 보인다.

『토지』에 쏟아지는 찬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박경리는 분명 훌륭한 작가이고,『토지』역시 훌륭한 작품이다. 다만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책을 책장에 꽂은 뒤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토지』의 문학적 성취가 아니라 우리나라 문단과 문인들이 그와 그의 소설에 얼마나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거였다.


분량 때문에 대하소설 읽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사실 첫 권을 잡는 것이 어렵지(근데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다) 막상 시작하면 의외로 마지막 권까지 한 호흡으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이 대하소설이다. 대하소설의 특성상 긴 흐름을 유지하는 요소들 즉 인물은 인물로, 사건은 사건으로 이어지는 극의 연속성이 독서를 지탱해주기 때문. 더군다나『토지』는 공중파에서 여러 차례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탓에 드라마를 봤든 안 봤든, 소설을 읽었든 안 읽었든 대중들에게 서희·길상은 한 번쯤 들어 본 낯익은 이름이 되었고, 어린 계집아이 서희의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테야!”는 어느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이 눈을 부릅뜨고 내뱉던 “부셔버릴 거야!” 만큼이나 유명한 대사가 아니던가.

 

 

모든 소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소설은 ‘소설을 읽는 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느끼는 재미와 감동의 영역이 달라진다.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을 누구는 연애소설로, 누구는 역사소설로, 또 누구는 사회고발소설로 읽기도 한다. 대하소설『토지』역시 수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또 그 인물들의 수만큼 많은 이야기가 펼쳐지므로 읽는 관점이 다양하다.
막대한 재산을 두고 벌이는 친인척간의 암투. 빼앗긴 토지를 되찾으려는 집념 강한 한 여성의 일대기. 일제강점기 찢어진 산하에서 버티고 살아 남는 민족혼. 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항일투사들과 핏줄을 묻은 땅에 남아 민족의 정기를 지키려는 동학 잔당들. 일제 강점기 친일파와 민중들 사이에 벌어지는 민족적 갈등. 그 외 기타 등등...

 

이렇듯 한 권의 소설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겠으나 내가 읽은『토지』의 이야기의 근간은 독립 운동도 아니요 동학 운동도 아니요 그렇다고 민중의 이야기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게『토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연애사건’이라고 하겠다.『토지』는 숱한 인물들이 벌이는 연애사건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되는 소설이다.

 

언젠가 인터넷에 떠돌았던 우스개 소리처럼 그들은 동학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랑을 하고, 신지식과 아나키즘을 부르짖으며 사랑을 하고, 예술을 하면서도 사랑을 한다. 평사리에서도 사랑을 하고, 진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용정 만주 상하이 일본에서도 사랑을 한다. 특이한 것은 주요인물로 범위를 좁혔을 때 정상적인 사랑을 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다 보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불륜은 예사고 때로 패륜도 등장한다. 연애사건의 백미인 삼각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그냥 ‘Love’도 아닌 ‘Love affair’다. 이건 박경리 작가의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왜곡된 사랑’의 형태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점 때문에 소설『토지』의 통속성이 유난히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통속성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의미 그대로 통속적이라는 뜻.

 

 

연애사건의 주인공들 외관이 평범해서야 아니 될 말이다. 그랬다간 이야기의 재미와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할 터. 당연히『토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귀골’의 선남선녀다. 그중 연애소설의 통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들이 이양현과 송영광으로 이 두 사람은 단연 돋보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예민한 감성, 그것에 어울리는 상처를 지닌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정체성은 각자 양어머니 최서희, 아버지 송관수에 기대고 있어 막상 그들 본연으로는 이야기를 끌고 가거나 지배할 힘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즉 그들 자체로는 존재감도 없고 매력도 없다는 얘기. 그들의 아픔, 상처, 방황, 사랑에 썩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끼기가 힘드니 그들에게는 안 된 일이다.

 

 

『토지』에는 환(구천)과 별당 아씨, 용과 월선, 서희와 길상-상현, 상현과 명희-기화(봉순), 인실과 오가다, 양현과 영광은 물론 오송과 선혜, 인옥과 상길, 몽치와 모화에 이르기까지 따로 떼어내도 한 편의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나올 것 같은 인물들이 많다. 이들 중 인옥과 상길은, 물론 둘 다 큰 상처를 극복한 후이긴 하지만 등장인물들 중 드물게 슬며시 웃음이 나게 했던 귀여운 중년 커플이어서 기억에 남고, 이야기가 좀 더 있었으면 싶었던 이들은 몽치(박재수)-모화였다. 양현과 영광처럼 아름다운 외모도 아닌, 뛰어난 예술적 감성을 가진 것도 아닌 하물며 등장하는 장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아름답고 청초한 수선화 같은 양현과 영광에게 질릴 즈음 등장한 이들은 토지 후반부를 읽는 동안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이 두 사람에 관해 잠깐 부연하면, 모화는 첫 결혼 실패 후 아들과 노모를 데리고 통영의 뱃사람을 상대로 술 장사를 하는 여성이다. 결혼 전력, 딸린 식구 거기에 나이마저 연상인 자신의 주제로는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몽치의 청혼을 뿌리치는 모화와 그런 모화에게 사정하고 화내고 빌다가 나중에는 두들겨 팬 끝에 ‘혼인은 안 하지만 동거는 하겠다’는 대답을 받아내는 몽치. 결국 소원하던 합가를 이룬 뒤 몽치는 장가들었다 하고, 모화는 같이 산다고 하니 일견 김유정 식의 토속적인 해학을 느끼게 한다. 한편 몽치는 환 이후로 근근히 동학의 명맥을 잇는 모임에서는 또다른 일면을 드러내는데 어린 나이에 깊은 산중에서 죽은 아비의 곁에서 밤을 지샌 이력이 있는 몽치는 동물적인 직관을 지닌 인물로 얼핏 환을 잇는 면모가 보인다.
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들은 역시 뭐니뭐니 해도 환과 별당 아씨, 용이와 월선이, 서희와 길상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을 지켜보는 동안 참 많이 설레고 즐겁고 슬프고 행복했다.

 

 

내게『토지』세트를 선물한 이는 M이다. 평균 하루 한 권 꼴로 읽은『토지』는 책을 읽는 이십여일 동안 1부 2부 3부 4부 그리고 5부로 진행될수록 그것과 비례해서 M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내가 혼자 롤러코스터처럼 떠드는 동안 비록 대꾸는 없었지만, 가끔 짜증은 냈지만, 어쨌든 묵묵히 그 많은 불평을 들어준 M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누군가에게 쏟아내지 못했더라면 독서가 훨씬 지루해지고 편협해졌을 것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M이 어릴 때 읽었다는 임어당(=린위탕)의『북경호일』얘기를 해 준 적이 있는데 내겐 그 얘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북경호일』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과연 이들이 행복했을까 했다는 얘기였는데 M군이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주인공들을 괴롭히던 시대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라고 했다.
『토지』마지막 권을 덮으면서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해방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는 평사리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듣는 서희의 모습에서 끝나는 이 긴 이야기가 그러나 그대로 조정래의『태백산맥』의 시대로 이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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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도서 김언수 / 캐비닛 3 ??.05.12
103 도서 김연수 / 사랑이라니, 선영아 2 ??.05.12
102 도서 김연수 / 청춘의 문장들 2 ??.05.11
101 도서 속죄 Atonement, 이언 매큐언 4 ??.03.11
100 영상 주걸륜 / 말할 수 없는 비밀 6 ??.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