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야 / 내 사랑 백석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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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3734 bytes / 조회: 4,505 / ????.10.18 11:10
[도서] 김자야 / 내 사랑 백석



- 左 『내 사랑 백석』 右 -『정본 백석 시집』(문학동네)
( 시집 표지의 백석을 숨기고자 했더니 사진이 참 안습이로고;)

그 여자
기명은 진향. 아호는 자야. 김자야(본명 생략. 1916~1999)는 조선권번에 기생으로 입적하였으나 기생 신분으로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이라 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고,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동경 유학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다. 책 표지 속에 있는 빛바랜 상반신 사진 외에 18세 때 모습 한 장이 전부인 자야 여사는 그녀 입으로 고백하듯 정말 여리고 가냘프다.

그 남자
소설로 등단했지만 시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95). 당대 문단 최고의 미남이었으며 영어뿐 아니라 러시아어도 능한 해외소설 번역가였고(분단 이후 북한에서도 번역일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부임 사흘 만에 반 아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가 하면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축구를 즐기는 소박한 품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 사랑 백석』은 자야 여사가 기생 신분으로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백석을 추억하며 써내려간 에세이다.
자야가 백석을 만난 것은 1936년 그러니까 백석이 스물 다섯, 자야 여사가 스물 하나.
잠시동안일 줄 알았으나 영원이 되고 만 이별을 한 것이 1939년 백석 나이 스물 여덟, 자야 여사의 나이 스물 넷.
그리고 두어 차례 입원의 위기까지 넘기며 4년여에 걸쳐 틈틈이 그녀가 직접 작성한 원고가『내 사랑 백석』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 것이 놀랍게도 1995년이다. 그녀 나이 팔순 때 일이다.
마치 어제 일처럼 소상하고 뚜렷하게 백석을 추억하는 그녀의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무려 6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거짓말같다. 그러니 자야 여사가 펼쳐놓는 백석 시인과의 사랑이 어떠했을지 능히 짐작할만 하다. 실제로 두 사람의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로맨스를 좇다보면 '참으로 낭만적이구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두 사람의 만남부터가 그러하다.
졸업을 앞두고 그녀의 유학을 후원한 해관 신윤복 선생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자야 여사는 해관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귀국, 무작정 해관 선생이 투옥된 감옥이 있는 함흥으로 향한다. 마침 함흥의 영생고보에는 서울의 조선일보사를 그만 둔 백석이 영어 교사로 부임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함흥에서 우연히 만난다. '자야'는 함흥 시절 백석이 직접 지어준 아호.
백석은 굳이 구분하자면 재북작가로 불려야 마땅하지만 해방 직후의 경직되고 살벌한 분위기 속에 여타 월북작가들과 함께 오랫동안 남한 사회에서 이름을 들을 수 없는 문인이었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해금되어 뒤늦게 그와 그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백석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2년쯤 전에 M군이 서점에서 백석의 시집을 골라주면서였다. 이후 백석이 내가 완소하는 시인이 된 것은 당연하다.
굳이 작가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내 경우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경로는 보통 두 가지인데 이를테면 작가의 작품에 반해서 작가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경우와 작가에게 반해서 작가의 작품까지 덩달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백석의 경우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깝다.

나는 1934년부터 이후 5년간 영생고보를 다녔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3학년이었으니 1936년 봄, 어느 오후 시간이었다고 기억된다. 수업시간 사이에 5분씩 휴식시간이 있어서, 나는 마침 우리 교실이 있던 2층 창가에서 운동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양복 차림의 '모던 보이'(당시에는 멋쟁이 신식청년을 모두들 이렇게 불렀다)가 교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의 현관으로 서슴없이 걸어들어오는 그의 옷차림은 일본식 용어로 '료마에'라고 하는 두 줄의 단추가 가지런히 반짝이는 곤색 양복이었다. 모발은 모두 뒤로 넘어가도록 빗어올린 '올백'형에다 유난히 광택이 나는 가죽구두는 유행의 첨단을 망라한 세련된 멋쟁이의 모습이었다. 이런 옷차림과 멋스러운 스타일은 당시 인구가 고작 5만밖에 안 되는 함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으므로, 함께 내려다보던 4학년 을조(乙組)의 동급생들은 창틀에 매달려 일제히 우우 하는 함성을 그 '모던 보이'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p.74)

당시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잘생긴 모던보이 시인이었던 백석은 남아 있는 흑백사진만으로도 굉장히 세련되고 멋진 인물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기껏해야 3년 남짓한 짧은 인연이지만 자야 여사와 사랑에 빠진 그는 얼마나 낭만적이고 귀여운가.
주위에 사랑에 빠진 친구가 있어본 사람은 다 안다. 그들이 질리는 줄도 모르고 끝도 없이 하고 또 하는 사랑 얘기가 얼마나 유치한지. 자야 여사와 백석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래도 부럽기는 마찬가지다. 기어이 부러운 한숨을 내쉬게 하고야 만다.

하숙집 대문을 나서서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장독을 파는 옹기전이 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목간통(목욕탕), 사진관이 있었다. 당신은 언젠가 이 사진관 앞으로 지나오면서 사진관 진열장 속에 걸린 여자의 사진을 일부로 외면하고 갔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는 당신말고 다른 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 싫어!" 라고 해서, 우리는 함께 웃은 적이 있었다. (p.64)

집안의 명령으로 세 번 결혼하였으나 세 번 모두 신부 얼굴도 안 보고 혹은 신부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다음 날이면 자야 여사에게로 도망쳐 오는 백석. 신분과 시대의 한계를 실감하며 툭하면 백석에게서 달아나 숨는 자야. 그러면 또 귀신같이 그녀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는 백석.
한 번은 역시 달아나 숨은 자야를 찾아낸 백석이 그녀에게 詩 한 편을 던져주고 가는데 그 詩가 바로「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비록 자야 여사가 확신하는 것처럼 詩 속의 나타샤가 자야 여사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백석 본인만 알겠지만 그러나 나 역시 나타샤가 자야 여사일 거라고 믿고 싶은 것은 그만큼 그들의사랑이 예뻤던 탓이다.
이렇듯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던 중에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 신경으로 도망가자고 한다. 그러나 자야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서울에 남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 된다. 이 때가 1939년의 일이다. 연인들의 불타는 사랑도 시대를 비켜갈 수는 없었던지 창씨개명과 강제징용을 피해 멀리 북쪽으로 떠나는 백석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 짓던 것이 영영 이별이 된 것. 
*백석이 세 번 결혼한 대목에서 로맨스소설을 사랑하는 뭇 여인들은 허걱! 할 수도 있겠으나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이 가문을 보살피고 대를 이어야 하는 장남과 그리고 정상적인 혼인은 불가능한 - 당시의 관습과 법도가 그러했다고 한다 - 기생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내 사랑 백석』은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으로 기생이 되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문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자야 여사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당대의 멋쟁이 모던보이 문학청년과 나누는 예쁜 사랑 얘기 외에도 자야 여사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20세기 초 우리나라 근대의 풍속을 엿보는 재미가 제법 실하다. 또한 책 중간중간 그리고 책의 말미에 백석의 詩가 실려 있어 백석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의 시를 알리고자 하는 자야 여사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시인과 시집에 수여하는 백석문학상은 자야 여사가 백석을 기리기 위해 사재를 들여 제정했다.

물론 이들에겐 아직 남아 있는 얘기들이 더 많지만 그러나 자야 여사의 백석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장국영, 매염방 주연의『인지구』는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사랑에 빠진 부잣집 도련님과 기생 여화는 현세에선 그들의 사랑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내세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음독으로 동반자살한다. 그런데 그렇게 끝나고 말았으면 좋았을 걸 내세에서 도련님을 기다리던 여화는 도련님이 오지 않자 인간 세상으로 왔다가 사실은 도련님이 음독 직후 살아 남았으며 뿐만아니라 칠순의 초라한 노구를 이끌고 지금껏 근근히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인연은 미완인 채로 끝나서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피천득 시인이「인연」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아니 만났으면 더 좋았을' '세번째' 만남도 있는 것이다.
백석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평생을 연인을 그리워하면서 혼자 살았던 자야 여사. 또한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에게 돌아오지 못해 괴로워했을 백석을 꿈에서나마 만나 행복해했던 자야 여사. 비록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의 아름다운 추억만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그녀는 한편으로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 다음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긁어온 에피소드.

-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사슴」이 이원 하였다 한다.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의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흰 바람벽이 있어」와 동주의 시「별 헤는 밤」을 살펴보면 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 인데 프란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 시인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 오막살이
*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없이
* 출처.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中 제2부「함주시초咸州詩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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