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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2770 bytes / 조회: 3,858 / ????.12.15 03:11
[도서] 노희경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첫 사랑에게 바치는 20년 후의 편지 "버려주어 고맙다"」 (pp.19-22)
그대가 나를 일방적으로 버린 스무 살 겨울, 나는 그대를 배신자로 낙인찍었었다.
매일 전화하고 하루걸러 한 번씩 만나고 서로의 속살도 아닌 드러난 살이 스칠 때에도 머리끝까지 삐죽하던 그때, 그대는 돌연 모든 걸 멈추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편지해도 답이 없고, 만나도 확연히 시들해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내 드라마 주인공은 참으로 상대에게 용기 내어 잘도 묻는데 나는 그대에게 묻지 못했다. 내 잘못을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어리석다. 사랑한 대상을 미워할 대상으로 바꿀 오기는 있으면서.
모든 겨울처럼 밤이 깊은 겨울이었다. 며칠째 몇 주째 연락이 안 되던 그대를 찾아 나섰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얇은 추리닝 바람이었다. 20년간 나는 그때의 내 행색을 다급함이라고 애절함이라고 포장했지만, 이제야 인정한다.
상처주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너보다 순정이 있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버렸다. 그렇다면 무참히 무너져주겠다. 내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할 네가 기어이 날 그냥 스쳐만 지나가겠다고, 네가 상처준 어린 이 사람을 똑똑히 기억하렴. 나는 눈 오는 그대의 집 앞에서 밤을 새워 오들거렸다. 그대는 이층 창문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 커튼을 쳤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대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대학을 갔어.
말해주고 싶었어.
뚝.
그대 목소리는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작고 의기소침했다.
반면 내 목소리는 얼마나 당찼던가.
잘됐군.

오래전 일이다.
어느 날 K가 전화로 뜬금없이『거짓말』이라는 드라마를 보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눈치이자 "엄마가 열심히 보길래 옆에서 몇 번 보다가 보게 됐어"라고 덧붙였다. 이후 나도 스치듯 몇 장면을 보기는 했지만 마니아 드라마라는 그 드라마를 TV앞에 앉아서 제대로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아마 드라마가 종영된 다음 날이이었던 것 같다. K가 다시 전화했고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K가 물었다. "그런데 드라마 제목인 거짓말이 뭘 뜻하는 것 같아?"
K의 물음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냥 말 그대로 거짓말 아닐까?"
물론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별 성의 없이 대답했던 스스로에게 그리고 K에게 오랫동안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다.

드라마를 즐겨 보면서도 극본을 쓴 작가가 누군지, 예전에 어떤 드라마를 집필했는지 관심 없던 시절이었다. 나중에서야 제법 재미있게 본『화려한 시절』과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개인적으로 명작으로 꼽는『바보 같은 사랑』이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노희경 마니아층을 만들어낸 첫번째 드라마는 역시『거짓말』인 걸로 안다. 나는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보다 종영되고 난 뒤에 드라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접했다. 그리고『거짓말』은 소설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첫 번째 드라마가 되었다. 두 번째 드라마는『굿바이, 솔로』

이젠 분당 초당으로 쪼개진다는 시청률에서 늘 나쁜 성적을 내면서도 마니아를 몰고 다니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 나는 그녀가 책을 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다렸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연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책 주문을 하려고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고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신작 에세이 출간 소식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아, 드디어"였다. 그러고도 망설였다. 실망하면 어쩌지. 실망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장바구니. 그리고 예정된 시간보다 더 일찍 내 손에 들어온 그녀의 책...

나는『화려한 시절』과『바보 같은 사랑』을 제외하곤 그녀의 드라마를 제대로 끝까지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만든 세계에서 사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날카로운 창 끝이 가슴을 겨누고 있는 듯 답답하고 위태로워서, 약간의 기대와 흥분을 안고 과자를 먹으면서 커피를 마시면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고 앉아 TV 너머 그들의 세상을 마냥 '구경'할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내 여리고 보드라운 정서는 그녀의 건조하고 날 선듯한 목소리를 버거워했다. 한 주에 몇 개씩 쏟아지는 많은 작가들의 고만고만한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과 그녀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 왜 다른가. 어차피 다 같은 사랑 아닌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드라마는 매번 이런 내 생각을 비웃었다.

참으로 건조한 목소리로 사랑, 사랑, 지치지도 않는지 사랑 타령을 하는 작가가 당연히 궁금했다. 사랑 때문에 깊이 상처받아 "사랑 따위!" 조소하고, 상대를 저주하고, 자신을 한없이 뭉갠다 싶더니 언제 그랬냐 싶게 "그래도 사랑만이 구원" 이라고 뻔뻔하게 사랑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날 것 그대로 보듬는 작가의 그 끈질긴 정서가 궁금했다.
한 때는 "이 작가는 로맨스랑 어울리지 않아" 혼자 단정 짓기도 했다. 지금은, 지금은 조금이지만 어쩌면 알 것도 같다. 사랑을 흉내낼 줄 모르고 꾸밀 줄 모르고 부서질 줄 알면서도 온 몸으로 부딪치는 무모한 그들의 사랑을 보듬는 이 사람이야 말로 사랑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작가인지도 모른다.

드라마 작가의 에세이답구나 싶은 그녀의 첫 책『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작가의 치열했던 한 때, 작가 자신, 사랑, 일, 주변인을 향한 그녀의 사적인 고백으로 채워져 있다. 책 사이사이에 꽂혀 있는(물론 빠지지는 않는다) 기름종이 내지에 작가의 필체로 쓴 짤막한 독백이 인상적이고 간간이 등장하는 드라마 얘기는 훔쳐보기 같은 가벼운 즐거움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드라마에 등장했던 독백톤의 대사들을 활자로 보니 새삼 그녀의 드라마를 소설로 읽고 싶었던 갈증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했다.
때마침 책에 그런 내용이 있다. 소설 출판을 제의하는 출판사쪽 전화에, "나는 드라마 작갑니다. 때문에 소설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뚝!) 응대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내 기분은 조금 이율배반적이었는데 첫째로 그녀의 드라마속 대사나 인물의 동선이 문어(文語)적? 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구나 조금 으쓱하는 기분이었고, 둘째로 소설은 안 쓰겠다는 작가의 단언에 실망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라마 작가로서 자존심이 단단한 그녀. 그럼 같은 극작가로서 그녀가 영화를 보는 관점은 어떤가. 나는 그녀의 드라마로 그녀가 꽤나 현실적인 강심장을 가졌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었다. 하지만 양조위 주연의『화양연화』속 불륜을 바라보는 그녀의 글과 소통하면서 이젠 그녀가 참 섬세하고 로맨틱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구나 한다. 그리고『거짓말』이 종영된 지 햇수로 십 년이 지나서야 성당 고해실에서 성우가 준희에게 했던, '이곳에 와서 한 고백은 나가면 그 죄를 묻지 않는다며? 널, 사랑한다. 아멘.' 그 말의 의미와 성우의 눈물을 이해한다.

책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표제와 똑같은「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몇 해 전부터 온라인에 떠돌았던,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시산문詩散文으로 이미 꽤 유명하다. (산문시는 어쩐지 진부한 듯 하다)
책의 마지막은 그녀와 작업했던 이들의 메시지가 채우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나 역시 그녀가 책을 내주어 고맙다. 내 여린 --; 감성이 사람 냄새가 물씬한 그녀의 드라마속 세계를 지탱하는 열정과 냉소를 버텨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덧붙여 모공중파에서 방영중인『그들이 사는 세상』에 등장하는 지오와 준영의 독백에 중간중간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으니 그들의 대사를 활자로 음미하고 싶은 동명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책을 읽을 때 보통 책갈피를 이용하는데 이 책은 책갈피 없이 읽었다. 한 번에 한 호흡으로 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나간 페이지를 다시 더듬는 것이 기꺼웠다는 의미다. 책을 읽다가 이유도 없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는데 정작 울먹울먹 한 것은 책 읽는 도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그래서 노희경이 누군지도 모르는 친구를 붙들고 코맹맹이 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오랜만에 바보같은 짓을 했다. 아... 내가 생각해도 난 참 바보같다.
드문 일이지만 내가 (책 혹은 작가와) 사랑에 빠졌구나,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지점은 같은 책을 여러 권 사서 책장에 쟁여두고 싶을 때다. 나머지는 책장 가장 좋은 위치에 귀하게 모셔 놓고 선택된 한 권을 줄기차게 읽고 또 읽고 그리하여 다자이 오사무가 단언했던 것처럼 두 손의 때로 책이 검게 빛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싶은 때가 그것이다.

올해 남은 기간을 대하소설 읽기로 계획했지만『아리랑』에서 좌초된 뒤 경제서로 옮겨가면서 독서가 다소 지리멸렬해졌는데 덕분에 독서가 오랜만에 활기를 띠는 것을 느낀다.

남의 상처는 별거아니라
냉정히 말하며
내 상처는 늘 별거라고
하는, 우리들의 이기.  (p.112.5)

라고 말하는 당신,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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