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욱 / 아내가 결혼했다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1711 bytes / 조회: 3,769 / ????.03.15 20:46
[도서] 박현욱 / 아내가 결혼했다


그 해,
월드컵 예선이 있을 때면 온 국민에게 '경우의 수'를 공부시키던 대표팀이 웬일로 차범근 감독의 지휘 아래 파죽지세로 4연승을 올리더니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지어 버렸다. 이때 왜 차범근은 사단이고, 오렌지는 군단이냐? 따지는 우스개 소리도 나왔더랬다. 하여간에, 차범근사단이 '너무' 잘 하는 바람에 갑자기 심심해진 국민들, 이번엔 이웃나라 일본의 본선 진출을 두고 '경우의 수' 공부하기에 돌입했다.
이때 일본은 본선 진출이 거의 좌절 직전이었으나 우리나라에 2:0으로 극적으로 이기고 조 2위가 되어(이때 일부러 져줬다느니 엄청 시끄러웠다) 다른 조 2위인 이란과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이기면 사상 첫 본선 진출이고 지면, 오빠 말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응원할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우리나라가 남은 경기에서 이기면 '경우의 수'에의해 일본의 본선 진출이 가능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나.
그리하여 일본과 이란의 경기가 있던 날 나는 TV가 있는 방에 출입금지 당했다. 오빠가 "니가 보면 일본이 이긴다"는 참으로 억울한 이유를 들어 나를 쫓아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이 이란에 1점 차로 승리,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 모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때 일이다.

여자가 싫어하는 남자는 '군대 얘기하는 남자, '축구 얘기하는 남자', '군대에서 축구했던 얘기하는 남자'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남자에게 축구는 군대와 더불어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축구라면, 그것도 프리메라 리그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가 역시 프리메라 리그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이 여자, 못 하는 게 없다. 요리도, 연애도, 일도. 취미도 같고, 말도 잘 통하고 거기에 제대로(?) 성(性)을 즐길 줄도 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남자가 이런 여자를 만났을 때 취하는 다음 행동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
소설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다. 친정 식구도 아니다. 전 남편도 아니다. 그녀의 엄연한 현재 남편이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평소 의식하지 못하던 관습에 의해 학습된 내 안의 보수성과 마주칠 때가 있다.
말하자면『아내가 결혼했다』는 이러한 내 안의 보수성을 자극하는,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을 하는 시놉시스를 가지고 전개되는 소설이다. 그러니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매를 할지 말지, 막상 읽기 시작한 뒤에도 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말다가... 독서가 매우 험난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문장이 가볍고 전개가 유쾌한 소설이다. 그렇다고 칙릿은 아니다. 소설이 제시하는 담론은 충분히 논쟁적이고 작가도 진지하다. 소설은 축구와 결혼이라는 두 얘기가 서로의 씨줄과 날줄을 얽으며 진행된다.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냐"는 축구보다 연애를 얘기할 때 더 많이 등장하는 안주거리같은 얘기다. 이 소설에도 이러한 축구와 연애(혹은 인생) 간의 상호 비유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골키퍼 있는데 골 넣을 수 있을까? 있다. 그게 축구의 룰이다. 그럼 이 얘기를 결혼으로 가져 오면 어떨까. 배우자가 있는데도 그녀의 연인이 되는 게 가능할까? 역시 가능하다. 불륜이라는 주홍글씨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연인을 누군가(=골키퍼)와 나눠 가질 자신이 있다면.

그런데 심지어 아내다. 심지어 아내는 불륜이 아니라 결혼이 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골이 문제가 아니라 골대 앞에 골키퍼 하나를 더 세우겠다는 얘기다. 축구에서 골문을 골키퍼 두 명이 지키는 건 반칙이 아니라 경기의 룰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건 이미 축구가 아니다.

소설은 있을 법 하지 않은 얘기를 있을 법하게 지어내는 거짓말이다. 있을 리 없는 얘기를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잘 하는 작가가 곧 능력 있는 작가다. 작가는 거짓말을 하고 독자는 알면서 속아준다. 그런데 이 소설의 거짓말은 알고도 속아주기엔 거짓말이 좀 많이 허술하다.

- 아내(인아)가 나(덕훈)와 결혼한 상태로 그 놈(재경)과 결혼을 감행한다. 문제는 복혼의 주체가 '아내'라는 것이다.
인아는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을 동시에 그것도 완벽하게 해낸다. 당연히 인아의 결혼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녀는 두 남편을 위해 집안 일을 두 배로 하고, 아내 역할을 두 배로 하고, 며느리 역할을 두 배로 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유로 첫 번째 남편 덕훈은 그나마 가사에서 아예 손을 떼지만 인아는 불평하지 않는다. 인아가 두 배로 치러야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덕훈은 인아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그놈이랑 하는 게 좋아? 나랑 하는 게 좋아?" "그놈이 오래 해? 내가 더 오래 해?" "그놈이 잘해? 내가 잘해?"
신년 연휴는 덕훈의 본가, 설 연휴는 재경의 본가를 오가며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해내는 인아는 그냥 슈퍼우먼도 아니고 초싸이어인슈퍼울트라캡숑짱 우먼이다. 이런 인아가 과연 쿨한가? 글쎄.
남편을 하나 더 얻은 대가로 인아가 치러야 하는 현실은 실로 끔찍하다. 만약 인아가 정말 독립적이고 현명한 여성이라면 덕훈과 이혼을 하던가, 재경과 헤어지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 아내의 결혼이 '한 번 더'에서 끝나고 마는 것은 소설이 보여준 가장 재미 없는 농담이다.
애초에 인아가 덕훈을 설득할 때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던 '폴리안드리'(일처다부제)는 남편 둘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남편 둘에서 멈추다니. 게다가 인아가 더 이상의 결혼은 그만 두겠다는 이유는 '두 집 살림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 덕훈과 인아가 모노가미(일처일부)냐 폴리안드리(일처다부)냐로 대립각을 세울 때 코빼기도 안 보이던 결혼 제도의 사회학적/관습적 굴레가 더 이상의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뒤늦게 등장한 것이다. 하긴 아무렴 어떤가. 처음부터 인아의 폴리안드리는 허술하고 일방적이고 오류 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일방적인 편들기에 힘입어 덕훈을 설득하는데 아무 문제 없었는데. 결국 인아와 덕훈의 논쟁은, 덕훈이 좋아하는 축구에 비유하자면, 처음부터 심판(=작가)을 매수한 경기였던 것이다.

- '복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인아의 논리는 허점이 많다. 특히 '이슬람의 코란은 네 명의 처를 두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p.220)는 부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인아가 덕훈을 설득하기 위해 인용한 코란의 구절은 '(감정적으로)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이슬람 개혁의 선구자였던 무하마드 압두는 이 구절을 신의 진정한 뜻은 일부일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설에선 이러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공평했다면 인아의 코란 인용에 덕훈은 압두의 해석으로 반박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 마음이라는 건데, 비빔밥을 시켜 놓고 좋아하는 나물만 골라 먹는 식이다.

- '종교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와 무관한 폴리기니(일부다처)가 가능하다면 폴리안드리(일처다부)도 가능하다'(p.139)는 인아의 주장은 일단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와 무관하게 오직 '애정'만으로 복혼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에선 썩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복혼이 평화적으로 유지되는 것에는 글쎄... 개인적으론 코란이 경고했듯 모두를 다 공평하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일부일처제와 무관하다'(p.191)는 인아의 논리. 인아에 의하면 그 이유가 '성경에 이혼은 금지했지만 복혼을 금지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p.191)이라는 건데 이쯤 되면 아, 이거 웃으라고 하는 얘긴가 헷갈린다. 그야말로 '먹으라고는 안 했지만 먹지 말라고도 안 했다'와 뭐가 다른가.
소설 전반에 걸쳐 덕훈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인아의 '폴리안드리' 논리의 전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인아가 영리한 걸까, 덕훈이 바보인 걸까.

어쨌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든 생각은 읽기를 잘 했다는 것이었다.
감상을 한 줄로 정리하면, '불편하지만 재미있는 소설'.
함께 읽어 보면 괜찮은 소설로 이만교의『결혼은 미친 짓이다』(민음사) 추천.

다음은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한편 재미있었던 부분.

(…)그리하여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한다.
남자들이 더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화 과정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대개의 여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사랑의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경험한다. 순정 만화와 로맨스 소설이 그녀들의 텍스트이다. 또한 여자들은 연애할 때, 이별할 때, 그리고 남자 친구가 바람피울 때, 그 모든 일들을 친구들과 공유한다. 이랬어. 어머. 저랬어. 저런. 이래야 돼. 정말? 저래야 한다니까. 깔깔. 그리하여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사랑에 관한 수십 개의 시나리오들이 완성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시나리오마다 배역과 연기의 색깔이 어느 정도 설정되어 있다. 즉 그녀들에게는 수십 가지의 대처 방안이 이미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남자들은? 1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 스포츠 만화나 무협지를 보며 영웅에 대한 환상을 키운다.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는 욕설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 속에 연애 이야기가 들어갈 자리란 없다. 사랑에 대한 시뮬레이션? 없다.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고 친구가 고민하면? "술이나 마셔"라고 말해 준다. (오쟁이를 지다니, 쪼다 같은 놈!)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럴 리가 있겠나. (생각한 적도 없다니까.) 막상 일이 닥치면? 왜 나야! - pp.118-119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39건 8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234 도서 이 한 / 조선기담 2 ??.07.02
233 도서 정미경『나의 피투성이 연인』外 2 ??.07.20
232 도서 황석영 / 바리데기 ??.07.26
231 도서 만감일기 / 박노자, 인물과사상사 3 ??.08.11
230 영상 동정 받는 악녀《태양의 여자》KBS2 8 ??.08.15
229 도서 『완득이』『논리-철학논고』『조선기담』 2 ??.08.21
228 기타 [비밀글] 안도현 / 너에게 묻는다 2 ??.10.06
227 도서 박경리 / 토지 2 ??.10.07
226 도서 김자야 / 내 사랑 백석 6 ??.10.18
225 도서 김연수 / 밤은 노래한다 2 ??.10.26
224 도서 윤광준 / 윤광준의 생활명품 ??.12.07
223 도서 노희경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6 ??.12.15
도서 박현욱 / 아내가 결혼했다 6 ??.03.15
221 도서 oldies but goodies <멘탈리스트> 5 ??.04.22
220 도서 장아이링「색, 계」 1 ??.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