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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5670 bytes / 조회: 3,656 / ????.05.13 18:10
[도서] 장아이링「색, 계」


 
그녀가 소곤거리듯 외쳤다.
"어서 가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가 곧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입구에 사람이 없긴 했지만 달려나가면서 바로 어둡고 비좁은 계단 난간을 잡으려면 문기둥을 잡고 돌아나가야만 했다. 연거푸 몇 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내려가며 울리는 쿵쿵 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 p.59

 

 

여자는 남고, 남자는 달아났다. 
직후 도로는 봉쇄되고, 여자는 도로에 갇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계속 궁금했다.
"어서 가요!", 여자의 말을 들었을 때, 혼자 달아날 때, 여자의 처형을 묵인할 때, 남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서 가요!", 남자에게 그 말을 할 때, 홀로 인력거를 탈 때, 흔들리는 인력거 위에서 거리가 봉쇄되는 것을 봤을 때, 여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대방의 사랑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맞이한 여자와 남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연극이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실제 삶과 다른 한 가지는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반면 연극과 실제 삶의 공통점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 누구의 상사 혹은 직원, 누구의 이웃 등등... 그러므로 연극에서 막이 내리는 것과 인생이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은 어떤 점에선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하물며 실제 삶이 연극이 되어버린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연극이든 삶이든 어느 한 쪽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과 함께 소멸되어 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이했던 것은, 그러니까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인데, 여자는 모든 것을 '끝내려는 순간'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남자는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여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구나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그럼 그들은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 두었을까.


원작인 소설보다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영화가 더 좋았던『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과『색, 계』의 공통점은 영화 말미의 시퀀스가 소설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원작과 별개로 감독이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는 것인데, 감독의 이러한 재해석으로 이들 두 영화는 원작과 또다른 독자적인 서사를 가지게 되면서 원작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그럭저럭 무난하게 읽었던 다나베 세이코와 달리 장아이링의 소설은 그녀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국내에 번역된 여타 중국권 작가의 소설들을 무난하게 읽은 것을 보면 번역자의 문제라고만 하기는 힘들 것 같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서사도 주제 의식도 모두 힘이 좀 달리는 느낌이랄까. 그런 면에서 전근대 격동기를 살아내는 여성을 지면 속에서 다루는 힘은 여성 작가인 장아이링보다 오히려 남성 작가인 쑤퉁 쪽이 한결 노련해 보인다.

『색, 계』는 국내에 출간된 그녀의 다른 책처럼 단편집이고 모두 7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첫번째 수록「망연기」는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짤막한 작품 소개글이다)
남자가 달아난 후, 혼자 거리로 나와 인력거에 탄 그녀가 인력거꾼에게 가자고 한 곳은 친척이 사는 '위위엔루'인데, '위위엔루'의 한자가 '愚園路'(우원로)이다. 이것이 실제 지명인지 작가의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장아이링의 문장은 번역되어진 것보다 한층 은유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평생 유일하게 자기를 사랑한 지기(知己)였다. 중년 이후에 이런 만남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
그는 현재 전쟁 국면이 일본에 점점 불리해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지기(知己)를 한 명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평생 영원토록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위로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만큼 강렬했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냥 감정이 있었다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원시시대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였고, 매국노와 매국노를 위해 결국 앞잡이가 된 관계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서로를 점유한 관계였다.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그의 귀신이 되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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