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 / 그해, 오사카에 내리던 봄비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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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5975 bytes / 조회: 3,744 / ????.06.29 15:16
[도서] 이혜경 / 그해, 오사카에 내리던 봄비


TV 채널을 돌리다가 기록영상, 기록사진 등이 나오면 어김없이 화면을 멈춘다. 마찬가지로 서점에서 그와 관련한 책을 발견했을 때도 어김없이 집어든다. 지나간 한 시절을 이 땅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살다 간 흔적이 담긴 흑백 필름은 나도 모르는 내 안의 향수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는 역사적으로 더 없이 비극적인 민족적 현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개화기 이전과 이후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작가에겐 소설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시대물은 글쓰는 이에겐 한번쯤 다뤄보고 싶은 영역인데 이는 디지털로는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유혹이 아닌가 싶다.

<그해, 오사카에서 내리던 봄비>(이하, '오사카')는 일제강점기 해방 직전이 배경인 로맨스 소설이다.
몰락한 양반가의 딸 여진은 위안부 강제 동원 위험에 처하자 과거 그녀의 조부에게 은혜를 입었던 송상의 아들 우빈과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온다. 우빈은 겉보기엔 사업가 한량이지만 실제는 독립군자금의 자금원이자 자금 운반책으로 자신의 이러한 역할과 처지 때문에 여진과의 정략결혼을 부담스러워 한다. 이외 주변 인물로 우빈을 좋아하여 몇 년째 쫓아다니는 하루, 귀족 가문의 가업을 잇는 대신 디자이너를 선택한 다케오가 등장한다.

영상과 문서 등으로 이미 자료화되고 명문화된 한 시대를 작가적 상상의 영역으로 가지고 왔을 때 작가는 소설적 허구와 시대적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데 이는 '한 시대'라는 실제 배경이 인물과 서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자칫 '시대 왜곡'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사카…>는 전반에 걸쳐 작가가 간과한 혹은 놓친 소설 구성상의 어색한 몇 가지가 눈에 띈다.
특히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여주인공의 정체성이다. 소설 구성 요소인 '인물'이 구축되는 과정은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과 거의 동일하다. 인물의 성격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요소요소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기 때문인데 (예. 흥부와 놀부가 제비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는 그들의 고유한 성격에서 비롯된 차이이다), 그런 점에서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주인공의 정체성은 소설 전반을 산만하게 만들고 개연성을 흐리는 주범이 된다.

몰락한 양반가, 독립운동 중 순국한 아버지, 궁핍한 생활 등의 배경 탓에 여진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큰 인물적 특징은 '자존심'으로 압축된다. 구체적으로 '신분적 자존심'과 '민족적 자존심'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주인공의 배경이 이와 같을 때 여주의 개인적 배경이 반상의 법도가 무너진 시대적 배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전개인데 이것이 소설적 리얼리즘이다.
그런데 <오사카…>는 막상 스스로 구축한 이러한 설정에 부담을 느끼는 듯 하다. 소설은 쉬운 길을 선택하는데 이때 갈등을 해소하는 방어기제가 되는 것이 바로 여주의 '현실적 감각'이다. 그러나 소설적 리얼리즘을 등진 여주 여진의 현실적 감각은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사카…>에서 여진의 '자존심'과 '현실적 감각'(=현실 적응)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동시에 존재해야 할 여진의 자존심이 마치 두 개의 패를 쥔 것처럼 따로 따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에피소드 속 여진의 심리와 행동 사이에 일관성이 없다. 한 예로 우빈이 정략결혼을 피할 요량으로 결혼 상대로 대충 둘러댄 하루가 일본인인 것을 알고(실은 조선인이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실린 장광설로 우빈을 호통치고 존대를 하대로 바꿔버리던 여진과 당시의 정서로는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를 걸어가는 여진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여주의 디자이너 되기 성장기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진이 일본(인)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일본은 싫지만', '일본인은 싫지만'이라고 부연하는 지문은 사족을 넘어 궁색한 변명처럼 보인다. 물론 장편의 긴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인물의 성격이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인공의 성격 변화는 결정적 사건에 의해 이야기가 반전 혹은 전환되는 순간에 이루어질 때 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결국 이쯤되면 여진의 현실적 감각이라는 게 혹시 불리할 때면 펼쳐보이는 '조커'인가 의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 그 자체로는 참신했던 여진의 (개성)방언이 지문과 대사를 넘나들며 역시 일관성없이 남발되다가 사라지다가를 반복하는 통에 계륵이 되어버린 것이나 반동인물 하루의 역할이 (로맨스)장르의 전형적인 주변인물에 머물면서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린 것 등은 지엽적인 문제.

두 권의 분량임에도 대체로 무난하게 읽은 소설.
아쉬운 대목은 눈 내리는 겨울 오사카의 풍경에 빗댄 연인의 감정을 시적 산문으로 표현했던 서두의 느낌이 그대로 소설로 이어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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