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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6143 bytes / 조회: 3,697 / ????.08.30 19:05
[도서] 이승우를 읽고


작가와 독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점에서 독서는 라이벌이 함께 뛰는 마라톤과 비슷하다. 작가가 너무 앞서 뛰면 뒤따라가는 독자가 지치고, 작가가 독자의 뒤에서 뛰면 앞에서 뛰는 독자가 흥미를 잃어 버린다. 그러니 가장 재미있는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비슷하게 뛰는 것인데 독자층에 또렷한 경계를 긋는 전문서적이 아닌 소설(문학)은 더욱 그렇다.
정치, 경제, 종교는 싸움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인 화제다. 이 세 가지 화제를 문학에 적용시켰을 때 그중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는 단연 종교일텐데 그 이유는 작가의 종교가 대개 화자를 구도자의 위치에 서게 하기 때문.
그러니 종교적인 피드백을 가지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의 소설은 아무래도 작가가 심어 놓은 상징과 은유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것에 한계가 있는데 이는 읽는 사람의 편견 때문일 수도 있고, 작가의 고집(=보수성) 때문일 수도 있다.
이승우의 소설은 개신교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 그의 소설 주제를 지배하는 것은 종교적 원죄 의식과 구도(求道)이다. 그렇다고 그의 많은 단편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니 미리 그의 소설 읽기에 금을 그을 필요는 없겠다.
이승우의 소설은 주제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어느날 일상성이 깨어지고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카프카式 부조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게서 비극적 전형성을 집요하게 캐내는 것으로 이때 기제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적 의식이다. 그의 소설은 거의 이 두 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인물과 사건은 대체로 다음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정서적으로 어딘가 한군데 부서지고 부족한 Loser가 등장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은 사람들, 그 이야기를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 카프카式 서사구조. 갑작스러운 소환과 그것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개인의 소외 혹은 격리.

단편집『심인광고』중 특히 좋았던 단편은 동명의「심인광고」「오토바이」「터널」.
카프카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첫번째 수록 단편「사령」은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카프카의『성』과 유사하다.
단편집『검은 나무』의 수록작 중「선고」역시「사령」과 마찬가지로 카프카 정서가 강한 단편.「동굴」에 등장하는 화자의 독백(p.224, 아래에 인용)은 일본 영화『기묘한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였던 '묶여있는 개'와 유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아무래도 나를 작가에게로 이끈「오래된 일기」다.(『오래된 일기』수록)

「일식에 대하여」
……나의 추리는 거기까지 이르렀다. 추리의 과정에서 나 자신 다소 흥분하고 조급해하였던 사실을 눈치채고 나는 좀 머쓱해졌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일에 흥분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 p.108

「동굴」
나는 유리창을 통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집에 감금되어 있는 신분이 낮은 남자의 신세를 떠올렸다. 남자의 신분은 화려한 집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 신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고 화려한 저택에서 턱없이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까지가 그러하다. 그 크고 화려한 집에서 그는 제왕처럼 지낸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집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긴 그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는 그 집을 나가는 순간 이 집의 온갖 특혜를 등지고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비참한 신세로 돌아가야 한다. 자, 그러면 이 호화스러운 집에 갇혀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 신분 낮은 남자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
p.224

「오토바이」
저놈이 나를 버렸다, 저 나쁜 놈이…… 하고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쁜 놈이란 건 맞지만, 내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건 맞지 않다. 모든 나쁜 놈들이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다고 나쁜 놈이 아닌 것도 물론 아니다. '나쁜 놈'이라는 건 한 인물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평가이다. 평가는 여러 가지 사실, 또는 특정한 사실에 기초해서, 심지어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도 내려진다. 어쨌든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그의'평가이다. 그러니까 '나쁜 놈'은 그렇게 불린 사람보다 그렇게 부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쁜 것이 아니라(나쁠 수도 있지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누군가를 버렸다고 말하는 건 사뭇 다르다. 우리는 버렸다는 행위가 있을 때에만 버렸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소한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어머니의 그런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중략) - pp. 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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