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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7397 bytes / 조회: 3,405 / ????.09.12 01:44
[도서] 하인리히 뵐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초6 때 일이다. 담임선생님이 곧잘 하던 놀이인데 학생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질문만, 다른 절반은 대답만 쪽지에 적어내게 했다. 그런 다음 쪽지를 거두고 무작위로 질문지 한 장, 답변지 한 장을 골라내어 맞춰 보는 것인데 아무렇게나 적어낸 질문과 대답이 그렇게 용하게 잘 들어맞을 수가 없었다. 물론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짜고 한 것처럼 아귀가 잘 맞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질문 : 선생님이 화나면?
대답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은 미디어 언론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그것을 권력화하여 어떤 식으로 한 개인과 그의 주변을 파멸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의 무게가 사뭇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40여년 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시민 교수님이 작년 어느 강연에서 이 소설을 추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소설을 반쯤 읽었을 때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언론사 기자가 젊은 여성에게 살해된다. 기자를 살해한 직후 여성은 자수한다. 사정은 이렇다. 크리스마스 시즌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카타리나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사실 남자는 지명수배자였고 감시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침이 되자 경찰이 아파트에 들이닥치고 남자를 놓친 경찰은 카타리나를 심문한다. 이 과정을 <차이퉁>이라는 한 신문사가 특종을 내세워 실시간 보도하면서 카타리나는 남자의 정부였다가 공범 테러리스트였다가 급기야 사회전복을 꿈꾸는 '빨갱이'가 된다. 뿐만 아니라 <차이퉁>은 카타리나를 지지하고 그녀를 도우려는 주변인들에게까지 보도를 확대하여 그들의 사회적 도덕적 윤리를 비웃고 의심하며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사실만 보도하고 있는 '대부분'의 신문들을 보여주며 위로하는 친구에게 카타리나가 반문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차이퉁》을 읽거든요!" - p.96

 

진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규명하기는 몹시 어려워도 그것을 왜곡하기는 너무나 간단하고 쉽다.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 미국 의회에서부터 시작된 매카시즘이 한 때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을 때, 해방과 분단을 겪은 직후 폐허가 된 남한에서 미워하는 누군가를 없애고 싶을 때 한 가지만 있으면 됐다. 바로 검지다.
검지로 누군가의 뒤통수를 가리키기만 하면 되었다. "저 사람이에요!"

미디어는 순수하지 않다. 오히려 교활하다. 미디어는 대중의 속성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의심과 불신의 씨를 뿌려둔다. 일단 뿌려만 두면 씨는 저절로 싹을 틔우는데 이때부터 미디어는 프로파간다(선동)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부끄럽게도 한 때의 나도 그랬지만 신문과 뉴스로 대변되는 '언론'에 대한 대중의 충성심이나 신뢰는 언제나 절대적이다.
'뉴스에서 그랬어' '기자가 그랬어' 이 한 마디면 콩을 팥이라고 해도 대중들은 (의심하면서도) 일단은 믿는다.
언론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 과연 옳은 일일까?
지면을 채우는 상업 광고가 곧 수익이 되는 언론은 당연히 광고주의 입김을 받는다. 언론사 사주와 사주의 직원들(=기자)에게 최우선하는 관심사는 회사의 이익 실현에 있으며 언론인의 사명, 진실 규명, 휴머니즘 따위는 모두 그 다음의 일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이런 현실에서 언론이 특정 권력에 예속되는 것, 혹은 그 자체로 권력화되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다음은 지인의 지인에게 일어난 일이었으며 실제로 한동안 지역 신문에 실렸던 실화다.
편의를 위해 Q 하고 하자. 결혼 직후 대낮에 집에 혼자 있던 Q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 했고 지역 신문에선 이 사건을 상당히 크게 다루었다.
신혼 초에 살해당한 20대 중반의 새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기사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신문은 소식통에 의하면 Q가 결혼 전에 사귀는 남자가 있었고, 평소 행실이 나빴으며, 이성 문제가 복잡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치정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있다, 는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결국 두 달 만에 범인이 잡혔는데 범인은 상습적으로 대낮 빈집털이를 해왔던 전과자였다.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사실도 밝혀졌지만 이때는 이미 양 쪽 집안 모두 무책임한 언론 보도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였다.

소설을 읽다 보면 활자체가 두꺼운 단어와 마주칠 때가 있는데 이런 부분은 한층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자 할 때 단어 선택의 범위는 한층 좁아지고 민감한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의사'(意思)라는 것은 사용하는 단어뿐 아니라 말하는 이의 어조의 영향도 받기 때문이다. 한 예로 똑같은 기사를 읽고도 기사의 논조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미디어 프로파간다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유롭게,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할 대중의 심리를 미디어 당사자의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앞세워 언제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염소몰이하듯 몰아갈 수 있다. 물론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중의 결론을 그들이 원하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소설 출간으로부터) 10년 후에 쓰여진 작가 후기, 역자 해설까지 꼼꼼히 정독해볼만 하다.
가독성도 좋고, 흡인력도 상당하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꼭 일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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