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치버 / 왑샷가문 연대기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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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136 bytes / 조회: 4,442 / ????.09.19 22:22
[도서] 존 치버 / 왑샷가문 연대기




도서관에 갔을 때 신착도서와 만나면 일단 집어 들고 오는 습관이 있다.
불과 두세 번만 앞 사람을 거쳐도 책이 벌써 너덜너덜 망가지고 더러워지니 새 책과 마주치면 횡재처럼 느껴진다.
존 치버도 그렇게 해서 만난 작가. 존 치버는 가끔 기성 작가들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 언급하는 걸 본 적은 있으나 그때마다 아, 이런 작가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작가의 국적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는데 그래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미국 작가의 소설은 '틈이 나면 읽어야지' 쪽이다. 그러니까 '틈을 내서 읽어야지'는 아닌 것인데 덧붙이면 나는 대체로 영국이나 독일, 동구권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읽고 났을 때 깊은 감흥을 받는다. 그러니 그동안 치버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가 미국 작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의 문학'이라고도 하는 미국 문학은 읽다 보면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곧잘 받는데 이런 느낌은 20세기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고 물론 치버도 그렇다. 거기다 존 치버의 소설은 거의 풍속소설에 가깝다.
'교외의 체호프'라고 불리운다는 존 치버는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장편소설은 겨우 다섯 편에 불과하다.
치버의 최초 장편소설『왑샷가문 연대기』를 읽은 감상은 체호프보다는 피츠제럴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구체적으로 풍경 등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1, 2부는 피츠제럴드를, 내용의 어조와 상관없이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순간 순간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았던 3부는 나보코프를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소설 초반은 눈으로 문장 사이 사이에 '/'를 그어 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겹치고 겹치는 복문이 성가시기도 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
『왑샷가문 연대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경 묘사인데 말 그대로 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보는 듯 하다. 읽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 더 제격인 치버의 묘사는 시간과 공간, 사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그려넣는 식인데 이를테면 이렇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트래버틴에서부터 이미 그 기차에 올라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코벌리가 나와서 형과 함께 은 식기 공장을 지나고, "동물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라는 전설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 라킨 씨의 낡은 헛간을 지나고, 렘센스의 밭과 '선원의 집'을 지나고, 얼음 연못과 양모제 공장을 지나고, 틀림블 부인의 세탁소를 지나고, 9시 18분 기차가 덜컹거리며 창가를 지나갈 때 민스파이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먹는 브라운 씨의 집을 지나고, 하워드의 집과 타운센드의 집과 건널목과 공동묘지와 줄로 톱날을 세우던 노인의 집을 지나갔다. 노인의 집이 마을의 맨 마지막
집이었다. - p.142

'연대기'라는 거창한 제목에 자칫 겁을 먹을만도 하나 가계도가 필수였던 마르께스의『백년동안의 고독』에 비하면 왑샷 가문의 가계는 아주 단촐하다. 게다가 전체 등장인물의 수는 수적으로는 많지만 모두 주변인물일 뿐, 실제 이야기는 리앤더의 두 아들 모지스와 코벌리를 쫓아가기 때문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형인 모지스는 의지나 노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리는, 운이 좋은 인물인 반면 치버 자신이 모델이기도 한 둘째 코벌리는 뭘 해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결국 풀리긴 하나 쉽게 갈 길도 어렵게 가는, 인물이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간 두 형제의 족적을 따라가는 중간 중간에 아버지 리앤더의 일기가 삽입되는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은 사건보다는 일상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즉 사건을 통해 인물이 드러나고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런 양식이 익숙하지 않으면 시종일관 건조하고 객관적인 작가의 어조가 자칫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유지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두꺼운 페이지 수가 얇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은 소설을 읽던 중에 웃고 말았던 대목들 중 한 대목.

모지스는 역까지 그녀의 가방들을 들고 가서 클리블랜드행 기차에 실어 주었다. 비어트리스가 그에게 우아하게 작별 키스를 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모지스, 내가 끔찍한 짓을 했어. 당신한테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항상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누구한테나 당신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것 말이야. 어느 날 오후에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한참 동안 얘기를 늘어놓았어. 당신이 날 이용했고,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돈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날 부도덕한 여자로 생각했을 테니까. 미안해. 당신한테 나쁜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이윽고 차장이 모두 승차했다고 외치자 기차가 클리블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 p.261

내용의 뒷부분을 부연하면,
불쌍한 모지스는 비어트리스의 깜찍한 거짓말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된다. 하지만 얼마 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니 모지스로서는 이 해프닝이 그리 비극도 그렇다고 그리 희극도 아니게 된 셈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이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이겠거니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현실과 많이 겹치는데 소설이 현실보다 덜 세속적인 것은 아마도 그의 심성 일면이 그러해서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읽으면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나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 어떤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재미를 못 느끼다 한참 지나서 문득 '그 소설 재미있었는데' 하기도 한다.『왑샷가문 연대기』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다 읽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어' 만족했던 소설이었다.

- 덧.
이 소설을 읽고난 후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 그대로 '교외의 체호프'가 딱 어울린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한편,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뒤로 펼쳐진 모든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치버의 서술을 읽으면서 장편이 딱인 것 같은 이 작가가 왜 대표적인 단편 작가가 된 것일까, 들었던 의문도 해소되었다. 단편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이력이 충분히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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