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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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907 bytes / 조회: 4,220 / ????.12.08 18:29
[도서] 베른하르트 슐링크『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먼저 작가에게 사과부터 해야겠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직전까지 헐리우드에서 영화화했으니 만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코드를 지닌 가벼운 장르소설 쯤으로 생각했다. 핑계를 대자면 이는 영화 포스터 일부를 띠지로 두른 출판사 쪽의 책임도 일부 있다. 장르소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경우 그 동안의 독서 경험으로 장르소설은 아무래도 줄거리 중심으로, 본격소설은 행간의 상징적 함의에 주의하면서 읽게 된다. 이는 경험에 의한 상대적 구분일 뿐 부연하면 장르와 상관없이 대개 처음 몇 페이지를 읽는 중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독서의 차이가 생겨난다.

『더 리더』는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고 1부는 두 사람의 만남과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게 되는 과정, 2부는 몇 년 후 법대생이 된 미하엘이 사라진 한나와 재회하고 한나의 비밀을 눈치채는 내용, 3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재회하기까지 그들의 모습을 다룬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열 다섯인 미하엘은 간염으로 휴학하고 집에서 요양 중이다. 그리고 병이 거의 회복될 무렵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가 길에서 구토를 하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한나에게 도움을 받는다. 첫 만남 때부터 서른 중반인 한나의 육체적인 매력에 이끌린 미하엘은 한나의 집에 드나들게 되고 어느 날부터 두 사람 사이에 '책 읽기 - 샤워 - 관계 - 함께 누워 있기'라는 순서가 생겨난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책 읽기인데 미하엘은 한나를 위해 소설을 낭독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한나. 한나와 다시 재회한 것은 몇 년 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이 옆 도시의 재판을 참관하러 간 법정에서다. 나치 전범을 심문하는 그 재판에서 한나는 피고인으로 등장한다.

나로 하여금 생각이 복잡해지게 만든 건 2부에 들어서면서다. 한나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진실을 알고 있는 미하엘은 왜 판단을 미루고 시종일관 모호하게 구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프롤로그 같은 1부를 마치고 2부에 들어서면 소설은 재회한 두 사람의 갈등이 부딪치고 해소되는 과정 대신, 미하엘과 한나가 그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태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고백하자면 내가 가진 도덕적 잣대로는 한나의 고집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을 들키는 수치심이 학살에 가까운 수많은 죽음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 쓰는 수치심보다 더 강하다는 것인가. 사적 수치심이 공적 수치심보다 더 강하다고? 

하지만 이런 질문 자체가 '문맹'이 내겐 낯선 주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시 이 문제로 혼란스러운 미하엘이 답을 얻고자 친구들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되풀이하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문맹의 수치심'이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가 아닌가, 앞서의 판단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당시에 친구들과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시도했다. 한번 생각해봐. 어떤 사람이 고의로 자신을 망치고 있어.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입장이야. 그러면 너 그 사람을 구하겠니? 어느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데 말야, 그 환자가 약물 복용자야. 그런데 그 약물이 마취에 방해가 돼. 그렇지만 환자는 자신이 약물 복용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것을 마취 전문 의사에게 말하려고 들지 않아. 너는 마취 전문 의사와 의논하겠니? 한번 생각해봐.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는데 말야. 그 사람이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입장이야. 범행은 오른손잡이의 짓이기 때문에 그는 범인이 아닌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어. 너라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사에게 말하겠니? 그 사람이 동성연애자라고 생각해봐. 그런데 그 범행은 동성연애자가 저지를 가능성이 없는 거야.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 피고가 자신이 왼손잡이라든가 동성연애자라든가 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계제가 아니야. 그런데도 피고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 - pp.148-149

 

화자인 '나' 미하엘은 그녀의 자존심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지만 좀처럼 대답을 찾지 못하고 철학교수인 아버지를 찾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미하엘에게 아버지가 내놓은 것은 '품위'와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덧붙여 "당사자와 직접 얘기해 볼 것"을 조언한다.

이런 류의 소설은 읽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난감한 숙제를 남겨 놓는다. 이를테면 나치 당원이었던 그녀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동정해야 하는가 라는. 그녀가 느끼는 수치심과 그녀의 자존심을 이해하는 한편 '어쨌든' 가해자인 그녀를 '그때는 무지했으니까' 라는 이유로 동정하거나 용서하고 싶지 않은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결국 바보처럼 훌쩍이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작가의 힘이다)

소설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문맹을 떨쳐 낸 후의 한나의 변화다. 재판 과정에서 한나가 반응하는 방식을 '그녀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다'라고 그녀의 무지가 문맹에서 비롯된 것임을 통찰하는 미하엘의 독백은 실은 한 개인에게 일어날 비극의 암시였던 것이다. 마침내 읽고 쓰는 것을 배웠을 때 그리하여 한 때 자신이 속했던 역사의 일부를 직시하게 되었을 때(=무지에서 벗어났을 때) 한나의 세상은 과연 희망적이었을까 절망적이었을까.

'읽고, 쓴다'.
공기를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겼던 이 사소한 행위에 대해 올해 들어 참 많이 생각하게 된다.
짧은 홍보 문구만 보면 얼핏 어린 소년과 중년 여성의 엽기적인 사랑이야기쯤일까 싶지만『더 리더』는 한나의 문맹과 미하엘의 침묵을 통해 독일이 계속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나치 과거의 역사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전후 세대의 갈등과 고민을 다룬 진지한 소설이다.

읽는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기억에 남는 독서였다.

3분의 2쯤 읽었을 때, 그리고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미하엘이 친구들에게 물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도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단지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의 책임을 지려고 해. 그런데 너는 그것을 알고 있어.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친구의 대답은, 중요한 건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가지. 본인이 그것을 원한다면 3자가 끼어들고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였다. 나는 그 사람의 판단이 올바른 상황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럼 진실을 알면서도 그냥 방관해야 한다는 것이냐,고 친구의 의견에 재차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였는데 순순히 친구의 대답에 수긍하기가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해서 결론을 이끌어내 결정을 내리고 나면 그 결론에 집착한다. 그러고 나서 깨닫는다. 행동은 별개의 것이며 결정은 따를 수도 있지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지 않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도 많았고 또 하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행동한다. - p.23

나는 그녀를 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부인否認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부인을 하는 건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건지, 심사숙고하는 건지, 난처함과 불쾌함을 피하려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본인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인은 배반의 다른 몇 가지 떠들썩한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토대를 앗아가버린다. - p.82

"전문가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그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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