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情-利의 정반합《추노》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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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0770 bytes / 조회: 5,457 / ????.02.02 08:18
[영상] 忠-情-利의 정반합《추노》


본문에 들어가기 전, 잡설.

 

(고등학생 때) 소풍 전날 국어 시간이었다. 수업 진도가 다른 반에 비해 빠른 편이었고 다음 날이 소풍이라 들뜬 아이들이 "수업하지 말고 놀아요~" 했더니 국어샘이 칠판에 쓴 것이 '正反合'이었다. 그러니까, '소풍 때문에 내일 수업을 못 하는데(정正), 오늘 수업도 안 하면(반反), 0교시나 8교시에 보충수업을 해야 한다(합合)'는 거였다. 헤겔의 변증법의 요체인 정반합을 들어 지금 수업 할래, 나중에 보충 할래 협박하는 국어샘한테 우리는 우우우우- 야유 좀 보내다가 결국 얌전히 수업했다.


 



-《추노》메인


몇 달 전 제작 얘기가 나올 때부터 재미있겠다는 느낌이 있었다. 예고편을 봤을 때도 역시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클스'를 보느라 1, 2회는 다운받아서 보고 3회부터 본방 사수하고 있는《추노》는《태왕사신기》이후 꼬박꼬박 프로젝트로 챙겨 보는 두 번째 드라마로 120" 화면에 전혀 밀리지 않는 영상은 물론이고 매 회, 매 장면 적확하게 삽입된 음악까지 퀄리티가 아주 만족스럽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눈과 귀, 머리와 가슴이 다 같이 즐거운, 매주 수목을 기다리면서 보는 드라마다.

나는 다변적이고 점층적인 서사를 좋아하는데《추노》는 이런 내 취향과 잘 부합된다.
드라마《추노》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결'쯤 되겠다. 간결한 제목이 주제를 매우 잘 드러낸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은 보통 크게 두 종류다. 인물이 서사를 끌어가는가, 서사가 인물을 끌고 가는가. 전자의 경우는 인물의 성격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데 이 경우 인물의 성격에서 사건이 비롯되므로 대개 처음의 성격(=정체성)을 큰 변화 없이 끝까지 고수한다. 인물의 성격이 곧 이야기가 되는《파스타》가 그 예. 시트콤이나《무한도전》《패밀리가 떳다》처럼 출연자의 캐릭터가 내용 전반을 지탱하는 최근의 리얼 버라이어티(?) 방송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중심이 되는 사건(이야기)를 둘러싼 인물들이 사건을 통해 정체성의 변화를 겪고 이렇게 성장한 인물들이 다시 사건에 직간접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이야기가 발전하는데《추노》가 이에 해당한다.

《추노》를 지탱하는 가장 큰 줄기는 시대적 배경이다. 여기에 이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있다.
조선 인조 시대가 배경인《추노》의 인물들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정서는 성리학의 삼강오륜이다. 주연은 물론 조연들까지 모두 '忠', '利', '情'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이들 모두 각자 자신의 이해(理解) 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부딪치면서 이해(利害)관계를 만들어 내는데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성장하고 이야기가 확장되는 것이다. 즉 이들을 지배하는 정서 '忠''利''情'이 정正(=신념)과 반反(=배신)을 거쳐 합合(=대결)을 이루어낸다.

애초에 송태하, 이대길, 황철웅을 지배하는 정서는 순서대로 충忠, 정情, 효孝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이들을 지배하는 정서도 강화 혹은 변화하는 계기를 맞게 되는데,
송태하의 충忠은 정情을 누르고 (병자호란으로 처자와 이별),
이대길의 정情은 이利를 앞서고 (이로 인해 패가망신하고 언년이와도 이별),
황철웅의 효孝는 충忠을 눌러 이利를 얻게 한다(좌의정 이경식과 결탁, 태하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울뿐 아니라 후에 그의 목숨을 쫓는다).



- 병자호란을 겪는 대길과 언년


이렇게 한차례 변화를 겪은 이들은 각각의 상대들과 얽혀들게 되고 서사도 한층 강화된다.

송태하는, 정情을 누르고 충忠을 따르지만, 충忠은 그를 정情(언년이)에게로 이끌고
이대길은, 정情을 잃은 후 이利를 따르지만, 이利를 쫓는 길은 어느 순간 정情을 찾는 길과 겹쳐지며
황철웅은, 충忠을 누른 이利가 원치 않는 정情(뇌성마비 부인)으로 그를 떠민다.




- 추노꾼이 된 대길

정반합이 가지는 진화의 속성은 연속성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합은 또 다른 새로운 '정'이 되고 이 '정'이 다시 '반'을 만들어내면서 '합'으로 진행되는 것인데 대길, 태하, 철웅의 관계도 이 틀 안에서 돌고 돈다. 그리하여

태하의 충忠은 철웅의 이利와,
대길의 이利는 태하의 '忠'과,
(태하의 '忠'을 쫓는) 대길의 이利와 철웅의 이利가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 대결: 대길 vs 태하




- 대결: 대길 vs 태하 vs 철웅


이런 맥락으로 보면 태하가 쫓기는 자가 되고, 대길과 철웅이 쫓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들 중 시작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유교적)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오로지 충忠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태하가 유일하다.

이런 식의 구도는 주변인물로 확대해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이를테면 대길의 이利와 천지호의 이利가 부딪치고, (좌의정)이경식의 이利는 태하의 충忠과 부딪치는 식으로..., 그리하여 서사는 더욱 탄탄하고 촘촘하게 짜여진다.

(8회까지 방영된 현재) 흥미로운 것은 태하가 언년이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고 있는 상황으로 보아 언년이를 두고 태하의 정精과 대길의 정精이 칼을 겨누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앞으로의 전개다. 2회에서 이미 태하의 충忠과 대길의 이利가 서로 칼을 겨눈 적은 있으나 이때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
대길의 정情은 언년이를 회상하는 눈빛으로 보아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利를 간단히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하는 어떨까. 과연 그의 충忠이 정情에게 자리를 내어줄까. (처자를 잃은 후 사소한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지킬 것을 맹세했다는 대사와 언년이를 건사하느라 스승님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보면 일견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인들인데, 남자들과 달리 여인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하나같이 정情이다. 언년이, 설화, 큰 주모/작은 주모, 황철웅의 부인, 초복이 등 주요인물 모두 예외 없이 그러하다. 단 한 사람, 이경식이 가까이 지내는 기생 찬의 정체가 모호한데 지난 방송(8회)에서 지나가듯 흘린 대사로 - 천냥 어음 관련 - 보아 아마 얼마쯤 반전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
장혁이라는 배우는 데뷔 이후 한번도 멋있다고도, 잘 생겼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배우였다. 그냥 저런 배우가 있구나 하는 정도. 몇 달 전에 패떳에 출연했을 때 그의 장기인 절권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기는 했지만 그때도 그저 의외로 특이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군, 하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번 드라마로 뒤늦게 이 배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특히 3회 마지막 장면. 배 위에 있는 송태하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가 내릴 때 가슴이 살짝 떨렸다. 물론 바로 다음 날, 이 마지막 장면이 낚시였음이 밝혀졌지만 - 언년이를 알아보고 활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는 - 하여간에 대길이는 정말 부산 말로 '대끼리' 하다. 인물 소개만 보면 대길보다 태하가 훨씬 멋있을 것 같은데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걸친 듯한 이대길, 장혁은 매 장면마다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 역시 민폐지존 언년이가 싫지만 부디 대길이가 언년이를 되찾길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왜냐하면 대길이가 언년이를 좋아하니까. 하여 오랜만에 감독님 목 붙잡고 흔들고 싶다. "제발 두 사람이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거나 말거나 이 드라마, 결코 해피엔딩은 아닐 듯 싶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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