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 세라 /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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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5607 bytes / 조회: 3,793 / ????.04.24 23:55
[도서] 마리우스 세라 / 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보통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다섯 단계란 '부정(Denial), 분노(Anger), 교섭(Bargaining), 우울(Depression), 인정(Acceptance)'이다. 이는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이 위협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생후 5주인 아이에게서 선천성 뇌질환이 발견되었을 때의 부모도 위의 다섯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왜 하필 내 아이에게(우리에게)"는 숱한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며 "이 아이가 내 아이,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된다. 그런데 이즈음에 이르면 부모는 이미 강해져 있다.

다섯 살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장에 가는 엄마를 쫓아 폴짝폴짝 뛰어 가는데 웃는 얼굴로 돌아보던 엄마가 뜬금없이 "저어~기 가서 다시 뛰어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얼마쯤 되돌아가서 엄마를 향해 뛰어가는데 그때 나를 보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서 '부모의 얼굴'을 발견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결국 병원에서 처방 받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비싼 영양제를 석달 정도 먹는 걸로 나 어릴 적 소아마비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아이가 약하면 약할수록 부모는 강해진다. 부모란,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에게 자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우문이다. 우리가 품어야 하는 물음은 '자식에게 부모란 무엇인가'여야 한다.

7살이 되도록 정확한 병명조차 진단받지 못한 유유. 유유의 증세를 의학 용어로는 선천적 뇌질환, 일반적으로는 '뇌성마비'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유유와 같은 아이를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보통 이런 내용의 자전적 에세이는 '감동적'이라는 표현이 제격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책이 그렇다. 가슴이 뭉클거리다 끝내는 콧날과 눈시울이 따끔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는, 물론 감동적이지만, 콧날이 시큰하지도 눈시울이 따끔해지지도 않는다. 대신 다른 책에 없는 것이 이 책에 있다. 바로 '재미'다.
저자 서문을 읽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나는 이 책을 첫 일화부터 폴리스코프로 장식하는 마지막 일화 바로 앞까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는 한편 '재미있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당황스럽고 불편했다. 한 가족에게 불어닥친 예기치 못한 시련을 담은 책에 '재미'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 것일까 고민이 되었다. - 딴 얘기지만 그러면 '재미'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나로 하여금 이러한 고민에 빠지게 한 건 유유의 아빠이자 이 책의 저자다. 물론 지면으로 옮겨진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겠지만, 픽션을 쓸 때 날짜를 매겨본 일이 없으며 그럴 날이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저자의 다른 글이 궁금할 정도로 저자는 유유와 함께 하는 나날들을 담담하게 무겁지 않게 일상적으로 기술한다. 일례로 제노바 항구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일어난 일화는 비록 유유로 인한 소동이긴 했으나 지극히 소시민적인 공감을 끌어낸다.
오에 겐자부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장애인의 아버지로 규정 짓고 싶지 않은 내공의 차이일까. 이유야 어떻든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읽는 이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도 의례적인 감동을 요구하지도 않을 작정인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감동 실화도 아니고,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극복기도 아닌 다만, 가만히 조용히 유유를 사랑하며 보낸 7년의 궤적이다. 그래서 유유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지, 예쁜 아이인지 일일이 설명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 유유는 정말 예쁜 아이구나. 아빠, 엄마, 누나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구나, 라고.

나는 문학의 치유 효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효과의 유무보다 타인의 불행을 위안의 도구로 삼는 것 같아 '감동 실화'로 명명되어지는 여타 미디어의 소산물이 영 별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최근 정서적으로 제법 힘든 며칠을 보낸 여파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보석같은 책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떠오른 건, 이 책이 '보석같은 책'이라는 거였다.
마지막, 유유가 달리는 폴리스코프(빠르게 넘기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연속 이미지)는 자꾸만 되풀이해서 넘겨 보게 된다.

유유가 달린다. 유유가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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