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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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463 bytes / 조회: 4,465 / ????.06.03 23:31
[도서] 최윤필 /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경계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몇 가지.

1.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스쿨버스를 운행했는데 내가 워낙 아침잠이 많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스쿨버스를 놓치고 시내버스로 등교했다. 그날도 스쿨버스를 놓치고 시내버스를 탄 날이었다. 출근 시간 버스는 미어터지는 승객들로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가 되어 다음 정류소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버스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버스로 몰려들었다. 아우성으로 시끄러운 곳은 버스 바깥만이 아니었다. 공간이라고는 머리 위 천장 밖에 안 남은 버스 안에서 기어이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아저씨, 그만 태워요!"

2. 어느 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냈는데 별 생각 없이 들여다 본 병 표면의 유통기한이 이틀이나 지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걸 마셔도 될까, 고민에 빠졌다.

3. 아마 할로윈 위크였던 걸로 기억한다. S와 일정에 없던 Thousand Islands를 향해 갑자기 출발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1000섬에 있다는 맥도날드 회장의 별장을 보러 가자'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출발은 산뜻하고 경쾌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여행의 끝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어디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지평선 너머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데도 섬은커녕 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껏 나선 길에 아무 것도 못 보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계속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데 어느 순간 어둑어둑해진 도로 저 앞으로 반짝이는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오호라, 저기구나, 좋아하며 얼른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차를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지점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그곳은 맥도날드 회장의 별장이 있다는 1000섬이 아니라 캐나다로 넘어가는 국경이었던 것이다. 일방통행 도로를 하나씩 양쪽에 끼고 가운데 커다란 단층 회색 건물 하나가 전부인 그곳이 미국과 캐나다를 가르는 국경이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국경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차를 빙그르르- 되돌려 그대로 속력을 내려는 순간 초소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영화에서나 듣던 "Freeze"소리를 들으며 반 강제로 차에서 내린 우리는 그제야 둘 다 여권도 학생증도 안 챙긴 것을 알았고 별 수 없이 국경 이민국 사무실에서 여권 번호를 불러 주고도 일 없이 2시간이나 붙들려 있다가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듯 살아오는 동안 나는 많은 경계를 만났고 경계 위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그중에는 의식/무의식적으로 경계를 들락날락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사는 동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와 같은 물적, 심적 경계와 수없이 마주칠 것이다.
경계는 우리의 의식과 생활, 우리가 누리는 물질세계, 정신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의 속성이 워낙 모호하고 희미하여 미처 못 느낄 뿐,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의 간섭을 받으면서 산다. 그러므로 경계의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단어 '바깥'의 의미가 확대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갈 듯도 하다.

저자가 선택한 것은 경계가 가르는 두 방향 중에서도 '바깥'이다. 그래서 제목도『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이다. 보통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은 '안으로 들어간다' 또는 '바깥으로 나간다'인데, '안'과 '바깥'이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원래 그러하다. 그런데도 저자는 굳이 '바깥으로 들어갔다'고 쓴다. 간단한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만 이 간단한 차이로 경계의 이쪽과 저쪽 즉, 안과 밖을 어느 한쪽의 소외된 공간이 아닌 수평적 공간으로 보고자 하는 저자의 배려가 읽힌다.

책을 읽으면서 '바깥'의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았는데 세 번째 챕터인 '퇴역마'에서 이 책의 제목 '바깥'의 단어의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막걸리'에 이르렀을 때 '바깥'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미추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다. 자의와 상관없이 바깥으로 밀려난 것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바깥에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밀려난 것들은 안으로부터 소외된 것일 테고, 스스로 자리 잡은 것들은 안을 밀어낸 것일 터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곳에도 희망은 있다. 안의 바깥은 또 다른 새로운 '안'이 되어 자생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10여 년 전이던가, M군이 '컬트'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마 "소수의 마니아적인 취미'라는 내용의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러자 M군이 "그럼 지금은 컬트지만 이후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아지면 컬트가 아닌 게 되는 거냐"고 되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실 주류와 비주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것은 내 편, 네 편 나누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경계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수평적 사고는 양쪽을 모두 고르게 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미리부터 문을 꼭꼭 걸어 잠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안과 바깥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 결국 중요한 건 소통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사물에 관하여 일정 부분 나름의 강박 증세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내 강박의 8할 이상은 책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애서가보다 공서가에 가까운 나는 책을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당연히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일었다. 일단 책을 펼치자마자 마주치는 책머리부터 저자의 유혹이 만만치 않다. 저자가 읽었다는 다니엘 켈만의 소설을 나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았으나 저자가 인용한, 책에 밑줄을 쳤다는 부분, '진실은 오로지 분위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야. 그려진 형태가 아니라 색채 속에. 정확하게 포착된 소실점은 진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에 나 역시 주저 없이 밑줄을 긋고 싶었다. 물론 나는 밑줄 대신 포스트잇을 붙었지만.
말이 나온 김에 포스트잇을 붙인 문장을 두 개 더 인용한다.
물론 우습다는 건 '과거의 미욱함'을 두고 한 말이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할 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 - p.159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는 막걸리 경쟁의 양상이 지역 단위 양조장까지 질식시킬 정도로 '와일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경쟁의 논리란 본래의 의미와 달리 힘센 자들이 사후적으로 펼치는 패권의 논리인 경우가 많고, 그 논리는
문화의 본래적 의미에 비춰 비문화적이거나 반문화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 pp.324-326

책이 예쁘다. 제목은 더 예쁘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다. 썩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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