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죄목은 무엇일까「저승」by 가오싱젠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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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0348 bytes / 조회: 4,643 / ????.06.25 20:07
[도서] 그녀의 죄목은 무엇일까「저승」by 가오싱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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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싱젠│ 오수경 , 연극과인간

 

얼마전에 어쩐 일로 온라인서점 세 곳에서 희곡집『피안』의 주문이 가능하지 않겠어요. 당연히 빛의 속도로 주문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세 곳으로부터 차례로 절판 연락을 받았어요. 페이지상으로만 재고를 확인한 제 불찰이었습니다. 사실 그닥 기대는 안 했어요. 그냥 혹시나- 한 거죠. 그러다 내친김에 혹시나 하고 도서관 홈피에서 검색했더니 도서관에 책이 비치중인 걸 확인(앗싸~), 얼른 대출해와서 드디어 읽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애증의『피안』이에요.;

가오싱젠은 중국 출생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주로 희곡을 쓰는)작가이고 200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요, 현재 서점가에서 가오싱젠의 책은 민음사의『버스 정류장』과 예술담론 1권을 제외한 다른 작품은 모두 품절, 절판됐습니다.

『피안』 은 표제작「피안」을 비롯해「저승」「생사계(삶과 죽음 사이)」「팔월의 눈」네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네 편 중 여기서 얘기하려는 건 두 번째 희곡「저승」입니다.

 

 


 

「저승」(여기서 등장하는 '장주'는 장자)

 

천하를 거닐며 철학을 논하던 장주는 어느 날 문득 고향에 독수공방 홀로 있는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의 정조를 의심한다. 그리하여 못된 장난을 계획하는데 내용인즉 자신이 죽은 것처럼 꾸며 상여를 앞세워 아내에게 간다.

 

장주의 아내

이 훤한 대낮 교만한 태양 아래, 웬 날벼락인가.
눈앞이 아찔하여라. 어두운 하늘, 캄캄한 땅.
멀쩡하던 서방님 졸지에 저 세상 사람 되다니.
낮밤으로 남편 기다리던 아내, 정말 팔자도 사납구나! (p.80)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하던 장주의 아내는 초나라 귀공자(로 변장한 장주)가 등장해 유혹하자 결국 귀공자의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 순간 귀공자가 돌연 아픈 척을 한다. 놀라서 걱정하는 아내에게 귀공자는 자신이 불치병을 앓고 있으며 이 병이 나으려면 사람의 뇌수를 먹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아내는 부엌으로 가서 도끼를 챙겨 장주의 관이 있는 방으로 간다. 그리고 도끼로 관을 내리찍기 직전 관 뚜껑이 열리고 (그 사이 변장을 벗고 관에 숨었던)장주가 나타난다.

 

장주

난 장주요. 귀신이 아니라, 바람둥이 아내의 남편이다.
나쁜 계집, 사람으로 수치도 모르는가?
여인아, 넌 왜 우느냐? 네 남편이 진짜 죽은 것도 아닌데.
됐소, 됐소, 한번 놀린 것뿐이오. 진짜가 아니라니까? (pp.92-93)

 

 

결국 정황을 모두 알게 된 장주의 아내는 도끼로 자살한다. 그리고 저승에 간 아내는 판관과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데 모두들 아내의 죄만 논할 뿐 아무도 아내의 억울한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장주의 아내

어떻게 감히 남편을 무고하겠습니까? 단지 억울함을 품은 귀신이 되기는 싫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희롱해서는 안 되지요.
아내 된 사람도 남자를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지요. 여잔 절대 사랑에 빠져선 안 되지요.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해도 절대 자기 생명을 가벼이 버려선 안 되지요-  (p.113)

 

 

심판을 받은 장주의 아내는 결국 혀가 잘리고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형을 받는다.

저승사자에게 끌려 음양의 경계를 건넌 장주의 아내가 인간세상을 바라보며 그러지 말 걸, 이제 꽃도 달도 못 보게 되었구나... 후회하며 혼잣말을 읊조리는 모습은 참 씁쓸한 여운이 남는 장면이다.

 

M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때였다. M이 불쑥 "아내가 뭘 잘못했는데?" 묻는다. 판관과 염라대왕에 의하면 남편을 배신한 부도덕이 죄라고 그러더군- 이라고 설명은 했는데 실은 속으로 뜨끔했다.
나 또한 내심 장주의 유혹에 넘어간 장주의 아내를 어리석다고 탓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아내를 잘 아는 장주가 아내가 정신적으로 약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유혹한 장난이야말로 정말 악하고 비열한 짓이었던 거다. 실은 장주의 아내는 잘못하지 않았고 나쁘지도 않다. 그녀는 그저 많이 지치고 약해져 있었던 불쌍한 여자였을 뿐.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장주로 끝이 난다. 이 장면은 장자의 지락편에 등장하는 일화와 겹치는데 일화의 내용인즉슨, 장주가 아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친 혜시가 조문을 갔는데 슬퍼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장주가 웬걸 술 마시고 노래부르고 있는 거다. 조강지처가 죽었는데 즐거워하다니 이게 될 말인가?, 추궁하는 혜시에게 장주 왈, 처음엔 자신도 무척 애통해 했으나 문득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이치이고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슬픔이 덧없더라- 한다.

장주가 그렇게 깨달았다 하니 그런 것이겠지.

 

장주

(사람들에게, 아내의 시체를 가리키며 조그만 소리로)한 마리 나비였어. 
(자기를 가리키며)한 마리 전갈이었지.
(사람들을 향해 히히 웃으며)
사랑도 좋고 욕망도 좋아. 사람들은 다 연극을 하는 거야. (p.95)

 

아내의 시체를 보면서 읊는 장주를 보니 서머셋 몸의『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에서 '죽은 건 개였어'라고 읊조리던 월터가 떠오른다. 남자들이란...

 

『피안』은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가오싱젠의 희곡 형식이 낯선 이에겐 가독성이 썩 좋지는 않은 책이다. 특히 메타희곡의 구조를 하고 있는 『피안 』은 제목에 어울리게 분열된 자아가 끊임없이 내뱉는 형이상학적인 독백을 쫓아가는 과정이 감각적인 방면으로는 빈말로도 '재미'라는 표현을 붙이기가 어렵다. 신기한 건 그럼에도 읽은 직후 묘하게 되씹는 맛이 있다는 거. 희곡이라는 특성을 감안, 등장인물들의 무의식과 내면이 뱉는 독백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가오싱젠의『피안』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세 번째 목록「생사계」역시 대표적인 메타연극 3부작 중 하나인데 독서가 보다 까다롭다.)

 

아주 오래된 옛날이요, 아주 해묵은 얘기고요. 
바로 지극한 현인 장자가 그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에게 황당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한번 말을 꺼내면 다시는 거둬들일 수 없는 농을 걸었다가, 이 믿을 수도 없고, 뜬눈을 감을 수도 없고 혀도 오그라붙고,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는, 귀신도 놀라 자빠졌던 연극이 벌어진 거요. 지금 사람들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예요.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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