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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0310 bytes / 조회: 5,306 / ????.03.19 03:20
[도서] 『풍아송』 by 옌롄커


풍아송
옌롄커 / 김태성(옮긴이), 문학동네

책의 제목 ‘풍아송’은 원래 『시경』에 나오는 내용별 분류 체제를 가리킨다. 즉 ‘풍風’은 남녀의 애정을 주로 다룬 여러 제후국의 민요・민가이며, ‘아雅’는 조정의 의식에서 주로 불린 시가이고, ‘송頌’은 선조의 덕을 기리는 종묘 제의용 악시다.  - 출판사 제공


사회적 약자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가능하면 안 보려고 기피한다.

일단 굳이 영상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익히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그에 더해 개인의 비극을 구제해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유일한 시스템인 국가가 나몰라라 하는 작금의 세태 때문이다. 현실은 시궁창이고 그 미래는 희망이 없는 걸 아는데 사도마조히즘이 아닌 이상 타인 혹은 이웃의 비극을 굳이 턱을 괴고 앉아 볼 정신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지식인, 소위 식자층의 숙명이랄까 소명이랄지. 고래로 사회의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무리의 선봉장엔 언제나 이들 식자층이 있었다. 인간은 제가 아는 걸 숨기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아는 만큼 보이는 식자로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현상인데, 이는 문학을 하는 이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문학은 결국 나와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서문에서 밝히듯 출간후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대단한 쟁론을 일으켰다는 <풍아송>은 수정자본주의 도입 이후 급속하게 자본주의화 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부조리'의 늪에 빠진 지식인의 나약함과 허무를 제대로 쫓아가기 힘들다. 사실 양커가 집착하는 '풍아지송'의 모태인 '시경'의 유래를 봐도 이 소설은 전체가 하나의 은유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소설을 읽는다면,

- 왜 양커가 제 집 안방에서 정사를 치르다 들킨 리광즈와 아내 자오루핑 앞에 오히려 무릎을 꿇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울면서 세 번 외쳤는지,
- 왜 양커가 대학당국의 세 치 혀에 휘둘려 정신병원행에 기꺼이 동의하는지,
- 왜 양커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6개월 만에 돌아온 제 집에서 불륜의 증거들을 보고도 조용히 그곳을 떠나는지,
- 왜 양커가 불륜을 넘어 숫제 살림을 차린 리광즈와 자오루핑의 행각을 밝히는 마지막 기회가 왔을 때 불륜이 아닌 표절의 시시비비를 더 중요시했는지

... 양커를 이해하기는 커녕 양커가 약지 못하고 답답하며 어리석다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건데 이러한 손가락질은 새벽 귀가길에 성추행을 당한 여자에게 '왜 새벽에 돌아다니느냐'고 피해자를 탓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소설이 자의든 타의든 부조리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지식인을 향한 비판으로 다가오는 가장 정점은 그 누구 혹은 그 무엇이 아닌 '양커' 자신에게 있다. 보다 분명하게는 '중문교수 양커'에게 있다. 한때 영화를 누렸으나 시대의 흐름에 밀려 쇠퇴하는 학문을 대표하는 양커의 불행과 불운은 지식인의 약점은 지식이라는 역설과 맞닿아 있다. 결국 시경 '풍아지송'에 대한 양커의 집착은 자본주의 속성에 편승해 상품화되고 선택되고 버려지는 중국 문단을 향한 통렬한 비판 뿐 아니라 지식인조차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통탄하는 자기비판이며, 수십 명의 남녀가 오줌을 갈기는 괴기한 장면은 통쾌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우는 나약한 지식인의 비통한 우화로 읽힌다.
기억해야 할 것은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지식인은 칼보다 약하다는 것. 펜은 죽지 않지만 지식인은 죽으므로.

*여담이지만,
한중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성의 성격적 특징이랄까 개성이랄까 그 차이가 재미있다.
대체로- 라는 전제를 붙여야겠지만,
중국남은 찌질하고, 일본남은 소심하고, 한국남은 우울하다.
놀랍지만 대체로, 일관되게, 그러하다.

서문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뭔가 <…에게 고함>이라는 부제가 붙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전문을 옮긴다.

넘쳐흐르는 글쓰기와 열독(閱讀) - 한국어판 서문
한 사람이 평생 쓰는 글은 한 가닥 선이라 할 수 있다. 하루 또 하루 시간 위에 새겨지는 생명의 시말(始末)이 아무리 구불구불하다 해도 이는 한 가닥 선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로는 생명 속에서 생명 이외의 것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는 게 바로 그런 경우다. 다시 산다는 건 이전에 지나간 생명의 연속이다. 하지만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의 그 짧거나 긴 죽음은(내가 말하는 것은 쇼크나 혼절, 가사상태 같은 게 아니라 진정한 죽음이다) 완전한 생명의 과잉이자 열쇠상태다. 생명이 뿌리 자체를 초월하는 '인생'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죽음도 그 또는 그녀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물론『풍아송』은 이처럼 길고 긴 인생과 죽음에 관해 쓴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탄생은 내 생명 전체를 관통하느 글쓰기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작품이 되었다. 『풍아송』은 대학에 대해, 교수들에 대해, 오늘날 중국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무력함, 비열함과 불쌍함에 대해 쓴 작품이다. 또한 물질과 금전,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타협과 숭배, 이상과 욕망의 이율배반, 저항과 탈비의 불화, 기개와 교태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해 쓴 작품이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복잡한 상태는 지식인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어쩌면 이 세계의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이 세계와 전 인류의 일상과 달리 오늘날 중국에서 줄곧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예상할 수 없고 상상하기 힘든 야릇한 일들이, 사실은 지식인들이 그 무엇보 반대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거나 앞장서서 몸소 자기파멸과 타락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국가와 사회, 권력과 당파, 금전이 멋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으로 자신을 만들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타협하고 마음대로 다양한 형태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유와 역사의식, 가치관을 지닌 전 세계 사람들이 오늘의 중국과 중국인들을 보며 이구동성으로 "중국인들이 어찌 이 모양이 되었을까?!"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이 책이 출판되고 나서 당시 벌떼 같은 비평과 비판, 쟁론에 부딪쳤을 때, 나는 방금 앞에서 했던 말을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저 『풍아송』은 내 정신적 자서전이라고, 나 자신에 대한 따돌림이자 비판이라고만 했다. 이는 나 역시 감히 미워할 수 없고, 감히 사랑할 수 없고, 감히 비판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국에서 『풍아송』을 출판하면서 서문에 이런 얘기를 쓰는 것은 이제 와서 내게 용기와 지략, 깨달음이 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을 썼다는 것이 그 제재와 사상, 함의를 놓고 보든 아니면 언어와 상상, 구조와 서사를 놓고 보든 간에,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내 생명에 한차례의 한계초과와 넘쳐흐름이 일어났었고, 그리고 그 결고가 내 작품으 좋아하는 한국 독자애게도 이런 뜻밖의 열독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지식인 소설 『풍아송』을 그 시기에 썼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지금 이런 소설을 쓴다면 이미 시의가 지나버리고 상황도 변해 있어 절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번역자와 출판사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분들의 노력은 내 글쓰기에 대한 지지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과 다른 나라들의 지식인 및 '지식인 소설'의 사유에 대한 공통인식이자 공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7월 17일 베이징에서
옌롄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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