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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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684 bytes / 조회: 5,862 / ????.11.25 03:52
[영상] 사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사실적인 연출로 유명세를 얻은 신카이 마코토의 중편 애니.

신카이의 애니는 <별의 목소리><초속 5센티미터>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인데 세 편만 두고 얘기하자면 신카이 이 양반은 첫사랑의 기억이 별로였나 싶은 의심이 살짝 든다. 특히 장거리 연애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으신가, 순정순정한 아이들이 매번 장거리 연애로 위기를 맞는다. 그나마도 우주를 가운데 두고 연애를 했던 <별의 목소리>에 비하면 '초속'이나 '언어'는 전철만 타면 만날 수 있는 도시이니 그게 어딘가 싶지만. 

분명한 건 연애, 구체적으로 연애의 끝을 응시하는 신카이의 시각이 묘하게 현실적이고 냉정하고 체념적이라는 거다. <언어의 정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초-중반은 (대만영화의 제목'만' 빌리자면)'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류의 풋풋한 첫사랑의 정서가 아련하게 흐르다 종반이 되면 '이제 꿈에서 깨어나세요'한다. <초속 5센티미터>에 비하면 희망적인 열린 엔딩이지만 여전히 사카이 마코토 식의 연애는 현실적이다. 그러고 보니 장거리 연애에서 연인을 만나러 가는 쪽은 늘 남자라는 공통점도 있다.

 

비교하자면 실험성은 <별의 목소리>, 연출은 <초속 5센티미터>, 서정성은 <언어의 정원>이 제일 낫다.

<언어의 정원>은 일단 제목부터가 문학적 수사이고(원어는 더 고풍스럽다), 실제로 문학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중요한 대사는 아예 고대 시가를 직접 인용한다. 언급하자면 신카이 마코토는 일문(日文) 전공자다.

 

<언어의 정원>은 평하기가 좀 애매한데, 이 애니를 보면서 중편의 장점은 뭘까 처음으로 고민했다. 애니든 문학이든 단편과 장편의 특장점은 알겠는데 중편은 모르겠더란 거.

 

45분 길이의 <언어의 정원>은 콘티를 영상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콘티에 영상을 입힌 느낌이다. 영상이 텍스트화 되었다고 할지. 문청 느낌이 풀풀 풍기는 대사의 영향도 있겠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이런 분위기는 아무래도 이 작품의 제목과 서정성에 큰 기여를 했을,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가요 쯤에 해당하는 <만엽집>의 한 대목을 두 사람 만남의 시작과 끝에 배치하는 수미상관식 구성의 영향이 크다.

 

여름, 비, 정원. 

이것이 <언어의 정원>을 구성하는 키워드.

 

장마가 시작할 무렵 만나, 장마가 끝날 무렵 이별한다.

하지만 연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작도 안 했으므로.

 

비오는 어느 아침 등교길 지하철역. 다카오는 충동적으로 학교가 아닌 역 근처 공원으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먼저 온 연상의 여자 - 유키노와 마주친다. 그 아침 이후 암묵적인 약속처럼 비가 오는 날은 공원에서 만나는 두 사람. 만남이 거듭되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는데 고1인 다카오는 대학 진학보다 구두를 만들고 싶어하고, 유키노는 미각을 잃어 맛을 느끼지 못한다. 다카오는 2인분 도시락을 싸고, 유키노는 다카오의 도시락에서만 맛을 느끼는데 이러한 일탈은 두 사람에게 일종의 휴식을 준다. 마치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속으로 들어가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만남의 장소인 공원이 도시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은 여전히 도시 한 가운데 있으며, 현실을 벗어나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다.  

  

내내 어른스러운 다카오, 오히려 미숙해보이던 유키노. 그렇다고 두 사람의 현실적인 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다카오는 진학을 고민하는 학생이며 가족 때문에 소소한 고민을 안고 있는 불안한 청춘이고, 유키노는 직장 내 갈등으로 입은 내면의 상처와 싸우는 조직의 일개 구성원이다.

첫 만남에서 짐작 가능한 두 사람의 관계는 실은 사제지간이다. 다카오는 몰랐지만 유키노는 다카오가 입은 교복으로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의 학생인 걸 눈치챈다. 유키노는 다카노에게 자신에 대한 힌트를 주려고 자신이 가르치는 8세기 고전 시가(詩歌)의 한 대목을 읊는데 불행히도 해당 과목을 배우지 않는 다카오는 힌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후 다카오는 그것이 만엽집의 구절인 걸 알게 되고 그 시가에 후렴구(=답가)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어쨌든 첫만남에서 다카오가 유키노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학내 사건으로 학생을 어려워하던 유키노가 다카오를 계속 만날 수 있었으니..., 때로 어떤 연애는 눈을 가려야지만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학교를 졸업한 다카오는 유키노를 만나러 갈까? 아마 만나러 갈 것이다. 비록 장거리 연애의 결말은 알 수 없지만. 신카이의 이전 작품에서 장거리 연애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생각하면 이쯤에서 예쁜 ost로 엔딩을 낸 감독에게 고마워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거듭 강조하지만 나는 해필리 에버 애프터 신봉자다.

 

 

 

 

유키노 :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텐데。」

 

다카노 :

 
「천둥소리가 조금 들리고、  

   비록 그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에 남아 있어요。

   그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遠くで雷の音が聞こえて、

   雲行きが怪しくなってきたけど、

   いっそ雨でも降らないかしら、

   そうすればあなたを引き留められるのに。」

 

「遠くで雷が鳴っているけど、

   たとえその後雨が降らなくても、

   私は此?に留まるよ。     

   君が「いて欲しい」と言うなら。」

 

<만엽집>

 

 

 

 

* 이미지는 사진 찍는 것에 관심이 없던 시절이라 파일을 뒤져 그나마 볼만한 걸로 건진 것.

<언어의 정원>의 배경인 신주쿠 중앙공원. 신주쿠 우에노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 신주쿠 중앙공원에 들러보는 것을 추천.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 시내 한 복판에 그토록 넓은 공원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이 곳의 첫인상은 까마귀, 고양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원을 즐기는 인파의 여유로움. 한 달에 두 번이던가 화요일은 휴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무 뒤로 NTT빌딩이 보인다. 하필 우중충한 사진인데, 일본식 정원을 가늠케하는 정원과 연못의 조성이나 예쁜 꽃밭 등등 눈이 즐겁고 산책하기에 좋은 예쁜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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